「재혼 8년」…애틋했던 부부애|사별한 부인친구와 재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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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8년여의 짧은 결혼 생활이었지만 초로(초로)의 나이에 깊어지기 만 하던 부부애였다. 서로 높은 지식과 연륜을 바탕으로 한 박사부부의 사랑은 죽음으로도 갈라놓을 수 없었다.
박희범 교수와 부인 채수희 여사가 결혼한 것은 73년 가을. 박 교수는 당시 충남대총장으로 재직 중, 부인 이소우씨(당시46세)가 고혈압으로 사망한 뒤였다. 부인 채 여사도 2녀를 낳은 후 남편과 사별하고 서울영등포에서 채내과 의원을 개업하고 있을 때였다.
채여사는 부농의 3자매 중 맏딸로 이화여대의대를 나온 의학박사. 박 교수의 전부인 이씨와는 국민 학교 동창생으로 경기도 안성이 고향. 동향의 소꿉친구 사이었다. 이씨는 생전에 3남2녀를 기르며 주치의처럼 채여사의 병원용 자주 다녀 박교수도 채여사를 익히 알고 지내던 터였다.
친척 등 주위에서 박교수와 채여사의 결합을 권했고, 채여사는 친구의 자녀 둘을 돌 봐주는 것이 보람된 일이라며 이를 응낙했다. 서울 타워호텔 렉스룸에서 1백 여명의 친지·하객들이 모인 가운데 권오익씨(전 성대총장)의 주례로 열린 결혼식은 두 사람의 약력소개와 맞절, 하객들의 박수로 간단히 끝났지만 부부는 다 성장한 자녀들과 합께 식장입구에 나란히 서서 하객을 맞으며 신혼부부보다 더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듯 했다고 참석자들이 전했다.
79년 박교수는 갑자기『서울생활이 싫다』며 대구로 내려갔다. 고향이 가깝기도 하고 계명대에서 그를 외래 교수로 초빙한 때문이기도 했다.
부인 채여사도 남편의 뜻에 흔쾌히 따라 서울 재산을 정리, 1천6백만 원을 주고 현재 살고있는 대지 80여평·건평 40여평의 방4개 짜리 조그마한 미니2층 슬래브집을 마련했다. 수돗물이 격일로 급수 뒤는 변두리 고지대로 장모 신정숙씨(80)·외종 질녀 윤양임씨(32)와 함께 4식구였지만 단란한 부부의 보금자리였다.
생활비는 조폐공사 경산 조폐창 의무실장으로 근무하던 채여사와 박교수의 학교봉급으로 충당했고, 막내딸(대학3년)의 학비도 보내줬다. 부부는 교통이 불편하다며 함께 운전학원을 다녀 면허를 땄고, 포니 왜건을 구입해 운전사 없이 서투른 솜씨로 번갈아 운전하며 드라이브를 즐겼다.
책 읽는 것밖에 모르던 박교수에게는 이때부터 부부가 번갈아 핸들을 잡고 나들이 가는 모 하나의 즐거움이 생겼다.
주행선지는 고향인 경북금능군어해면도암동. 그곳에는 전부인 이씨의 묘소가 있어 부부는 등산복 차림으로 옛 아내이자 친구의 묘소를 한 달에 한번 골로 찾아가 벌초하고 나란히 앉아 옛날을 회상하곤 했다는 것.
특히 박 교수는 은행 청소부·인력거꾼 등을 하며 후회으로 공부했던 지난날을 얘기하기도 했고『6·25때 이산(육남산) 칡 덩굴 밑에 숨어 죽을 고비를 넘겨 아호를 육남산으로 했다』고 설명하기도 했다는 것.
박 교수의 고종 사촌동생 윤범수씨 (57·농업) 는 박교수 부부가 내 남산에 오르면 보통 2∼3시간씩 정답게 앉아 얘기하더라고 했다.
박 교수는 불교신자로 돌아오는 길이면 부근 직지사에 자주 들르기도 했다.
8윌 31일 계명대 애서 야간 강의를 마치고 귀가한 박 교수는 다음날 새벽 엄청난 혈변과 객혈을 했다.
채 여사는 이날부터 퇴원한 지난 19일까지 환자 곁을 떠나지 않고 일체 외부인의 접근을 막은 채 혼자 간호를 전담했다. 결국 절망적이란 병원 측의 판정에 따라 퇴원하게되자 박교수는 고향에 사는 이종사촌동생 문용주씨(50)를 불러『내명이 너무 깊다』며 병명을 알고 모든 것을 체념한 듯 3가지를 부탁했다. 『첫째 사후 재산이 없으니 포니 승용차를 팔아 장례를 간소하게 지내고 자식들에게 부담을 주지 말 것. 둘째 전부인 이씨의 묘소 맞은편 내남산 봉우리에 묘소를 정하되 부인 채씨 묘도 그 밑에 함께 마련할 것. 셋째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장남 동률씨(34)에게 절대로 연락하지 말 것』등을 유언으로 남겼다.
동률 씨는 아버지와 같은·경제학 전공으로 미국 오리건 주립대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고, 박교수는 국내의 각종자료를 모아 보내주는 등 자상하게 보살피 주고 있던 터였다.
박교수 옆에 앉아 그의 유언을 듣고 있던 채여사는 슬픈 내색을 감추고 문씨에게 『형님 돌아가시거든 나를 도와주고 열심히 살아보자』고 태연히 말하는 듯 했으나 23일 친정어머니 신씨가 박교수의 수의(수의)를 준비하자 『내 수의도 함께 만들어달라』고 해 친척들은 이때 이미 채여사가 죽음을 내다보고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23일 박교수는 외종질녀 윤씨를 불러 묘비에 쓸 자신의 약력을 받아쓰도록 하고 『죽은 뒤 서울의 6개 일간지 사회부장 앞으로 보내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박교수가 남긴 재산은 집한채 (싯가 2천여만원)와 고향의 조그마한 농장하나. 그리고 서재와 직지사에 있는 서적 2천 여권이 전부라고 유족들은 밝혔다.
박교수는 성격이 강직하고 단순해 충남대총장 재직 때에는 데모학생을 무더기 징계해 말썽이 됐고 당시 천주교의 현실 참여를 비판해 논란을 빚기도 했다. 계획 경제학을 전공한 박교수는 최고회의 의장 자문위원으로 있을 때인 62년 당시 유원직 재경위원장과 함께 화폐개혁의 주역으로 알려지기도 했고, 그후 경제개발계획에 줄곧 참여했던 행동적 경제학자다.

<대구=권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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