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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쿠리도, 밥상도, '느끼면' 예술

중앙일보

입력

옛 서울역사 앞에 구경거리가 생겼다. 촌스럽다 싶을 정도로 선명한 싸구려 총천연색 플라스틱 소쿠리를 층층이, 겹겹이 쌓아 만든 7m 높이의 탑들이다. 밤이 되면 불이 켜져 훤히 빛나니 당최 눈에 띄지 않을 도리가 없다. 누구는 부처님 오신 날 연등을 떠올리기도 하고 누구는 아기 돌잔치에 올라온 모조 떡을 연상하기도 한다. 무엇을 생각하든 자유다. 작가에 따르면 “당신의 마음이 곧 나의 예술(Your heart is my art)”이기 때문이다. 현란한 색감과 분방한 예술관에서 전방위 아티스트 최정화(**)의 이름을 떠올렸다면 전시장 발품깨나 팔아본 사람이다.

옛 서울역사를 개조한 문화공간 ‘문화역서울 284’에서 10월 19일까지 열리는 ‘최정화-총천연색’전은 한국을 대표하는 국제적 작가인 최정화라는 이름을 알지 못해도 상관없다. 가벼운 마음으로 놀러가도 볼 거리는 적지 않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한국공예디자인진흥원이 주관하는 이 전시는 제목 그대로 총천연색으로 된 꽃들의 잔치다. 1600여㎡(500평) 규모의 전관을 처음으로 개인이 메운, 최 작가로서도 처음 여는 국내 최대 규모의 개인전이다.

민병직 전시감독에게서 기획 의도를 들어봤다. “근대와 현대가 이질적이고 혼란스럽게 공존하는 서울역이 ‘폐허’에서 꽃처럼 피어나 생명을 갖는 공간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다.”

불과 20년 전만 해도 이맘때의 서울역 광장은 반가운 이를 보내고 맞이하는 훈훈한 풍경을 목격할 수 있는 곳이었다. 지금과는 딴판이다. 광장에선 ‘불신지옥’ 플래카드를 앞세운 종교단체 집회가, 한쪽에선 자기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의 시위가 벌어지기 일쑤다. 이유야 제각기 있겠지만 확성기를 앞세운 공해 수준의 소음, 일방통행식 의사전달 방식 탓에 오가는 이들의 표정은 밝지 않다.

애물단지가 돼버린 서울역 광장이 어떻게 하면 달라질 수 있을까. 최 작가의 설명은 쉽고 명쾌하면서도 엉뚱하다. “사람들이 기념촬영을 할 수 있는 작품으로 공간을 채워보자는 생각이었다. (내가 해보니까 작품은) 사진발, 조명발, 화장발 좋은 게 최고더라.” 농담 같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꽃’을 주제로 밥상·소파·의자 등 온갖 ‘잡동사니’를 모아놓은 전시장은 그 자체로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1층에 전시된 ‘꽃의 속도-폐허’는 자칫하면 공사 현장인 줄 알고 지나칠 뻔했다. 역사(驛舍) 개조 과정에서 나온 폐자재를 바닥에 깔고 천장엔 누가 봐도 ‘최정화표’임이 분명한 샹들리에를 달아 늘어뜨렸다. 폐허에서 만개한 꽃의 이미지가 눈부시다.

에어 펌프로 작동돼 마치 꽃이 숨 쉬는 듯한 느낌을 주는 ‘꽃등’, 원숭이 등 갖가지 탈을 쓴 수많은 부처상이 놓인 ‘유연한 꽃-레이디스 앤 젠틀맨’, 비닐로 된 장바구니 수십 개를 탑 모양으로 쌓은 ‘꽃의 여가’, 반짝이 왕관을 수도 없이 갖다놓은 ‘임의 꽃’ 등이 이어진다. 전시장 창문 너머 야외에는 ‘당신도 꽃.입니다’가 휴대전화 촬영을 기다리고 있다. 고가도로와 고층 빌딩을 배경으로 고무로 된 마징가제트가 누웠다 일어났다를 반복한다. 1994년작 ‘갑갑함에 대하여’를 이번 전시를 위해 새롭게 가져왔다.

‘당신의 마음’을 ‘나의 예술’로 만드는 건 시민 참여를 끌어들인 데서 정점을 이룬다. 광장의 ‘꽃의 매일’을 위해 노숙인들이 8600여 개의 소쿠리 이어붙이는 작업에 동참했다. 노숙인 자활을 돕기 위한 대중문화 잡지 빅이슈코리아와 연계했다. 2층의 ‘꽃의 만다라’는 플라스틱 뚜껑으로만 이뤄진 거대한 설치 작품이다. 전시 기간 중 관람객들이 갖고 오는 크고 작은 플라스틱 뚜껑이 계속 더해져 30만 개를 채우는 게 목표다.

이 모든 것에는 최정화 특유의 ‘직설법’이 있다. “예술이 별거냐”는 자신만만한 목소리 너머에는 관람객과 통(通)하고자 하는 작가의 간절함이 느껴진다. 의도적인 인공과 모조의 느낌에 “조악하다”며 눈살을 찌푸리든, “재미있네”라며 ‘인증샷’을 찍든 모든 건 관람객 마음이다. 무료.
글 기선민 기자 murphy@joongang.co.kr

사진 문화역서울 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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