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람] 라이온스 클럽 후쿠시마 국제회장

중앙일보

입력

"라이온스 클럽을 늙은 부자(富者)들의 사교모임으로 보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1879년 미국인 멜빈 존스의 제안에 따라 출범한 이후 세계 곳곳에서 자선사업을 우리만큼 활발하게 벌이는 민간단체를 찾아보기 힘드니까요. 라이온스 클럽은 세계 최대의 봉사단체입니다."

지난 14일 4박 5일 일정으로 한국을 찾은 케이 K. 후쿠시마(66.일본계 미국인) 라이온스 클럽 국제회장은 기자가 "라이온스 클럽에 대한 일반인들의 오해도 있는 것 같다"고 운을 떼자 '또 그 얘기로군'하는 표정으로 자신과 라이온스 클럽이 어떻게 인연을 맺었는지를 설명했다.

후쿠시마 회장이 라이온스 클럽의 회원이 된 것은 1965년 이었다. 고등학생 때 아버지를 암으로 잃고 대학(캘리포니아대)을 힘들게 졸업한 직후였다.

당시 그의 직업은 보험회사 직원. 풋내기 직원의 주머니에는 돈보다 먼지가 많았다. 하지만 젊은 후쿠시마는 '사회를 위해 내가 뭘할 수 있을까'를 늘 생각했다고 한다.

"가난하지만 '집안의 명예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선친의 유언에 따라 '청년봉사단'이란 단체를 만들어 소외된 청소년들을 돌보았습니다. 나름대로 단체는 돌아갔지만 결속력이 부족했어요. 회원 24명 중 매달 열리는 회의에 참석하는 사람이 절반도 안 됐으니까요. 결국엔 활동도 힘들어졌죠."

이후 후쿠시마는 당시 교제 중이던 지금의 부인을 통해 라이온스 클럽 새크라멘토 지부의 한 회원을 만나게 됐다. 그리고 그의 제안으로 라이온스 클럽 회의에 참석했다.

"뭔가 활기찬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좋은 뜻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합리적.효율적으로 선행을 베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던 거죠. 그래서 바로 회원에 가입했죠."

물론 후쿠시마 회장이 처음부터 '될성부른 사자'였던 것은 아니다. 가입 후 2년간 한 일 이라곤 모임에 참석해 다른 회원들과 식사하는 것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2년 만에 클럽이 그에게 처음 맡긴 일은 거리 모금이였다. 비록 '미관말직'이었지만 후쿠시마는 열심히 뛰었다. 은행 앞에서 기부 기념으로 주는 배지를 들고 진을 치고 있다가 부모와 함께 은행에 들어가는 아이들을 공략해 부모들의 '주머니를 터는' 꾀를 발휘했던 것이다. 그 결과 그는 일주일 동안에 6천달러를 모아 지구 최고 기록을 세웠다.

능력을 인정받은 후쿠시마는 이후 승승장구했다. 자선영화 상영, 횡단보도 설치 등 기발한 아이디어를 잇따라 내놓으며 클럽의 사업을 주도했고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수년 만에 지부 부회장이 됐다.

78년에는 지구 총재에 올랐다. 86년 미국 뉴올리언스에서 열린 세계회의에서 국제이사가 된 뒤 마침내 지난해에 국제회장으로 당선됐다.

사실 클럽 내에서의 성공만큼이나 그의 사회적 성취도 화려하다. 보험업에 평생을 매달린 결과 그는 7개의 보험.투자회사를 일궈냈다. 모아놓은 재산도 상당할 터였다. 하지만 그는 이런 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사담 후세인을 보세요. 아무리 치부를 많이 했으면 뭐합니까. 자신의 동상이 발길질을 당하고 이리저리 숨어다니는 수모를 당해야 하는데. 제가 불교 신자여서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의 부는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클럽 활동에 더 애정이 가는지도 모르죠."

클럽 회장을 맡은 뒤 후쿠시마는 자신의 사업을 거의 돌보지 못한다고 한다. 세계 각국을 돌며 사업의 진행 상황을 확인하고 회원들을 독려하느라 일년 중 집에 머무는 날이 한 달도 안되기 때문이다.

이번 방한이 정기 방문이긴 하지만 4백80만달러(약 60억원)를 들여 지난해부터 평양에서 추진 중인 라이온스 안과병원 설립 사업의 진척상황을 확인하기 위한 목적도 있다.

후쿠시마 회장은 "북한을 돕는 것에 대해 좀 주저하는 시각도 있다"며 "하지만 라이온스 클럽이 정치적 이념을 따지지 않고 인도주의를 실천하는 단체인 만큼 어려움에 처한 북한을 외면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남궁욱 기자periodist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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