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일등시민이 되야 하나"|유학 보내놓고 국제전화로 성적 다그치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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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어느 학회에 참석 차 방한중인 한 재미교수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고국에서 못 다한 욕망을 한아름 안고 하와이로 건너가 손톱이 닳도록 힘든 일을 하며 산 어떤 교포 댁에 똑똑한 아들이 있었다고 한다. 본인의 꿈은 그림공부.
그러나 부모의 여지없는 반대와 애걸한 청원을 밀쳐낼 수 없었던 젊은이는 부모의 뜻을 좇아 의학도로 마음을 굳히고 미국 동부에 자리잡은 명문 브라운 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극심한 자기갈등, 저버릴 수 없는 부모의 숙원, 그 위에 전혀 상상조차 불허했던 상류사회 분위기에서 덮쳐오는 소외감, 문화적인 충격을 이기지 못한 이 학생은 자살 미수로 학교에 소란을 끼친 끝에 작년 여름 방학을 맞아 하와이로 돌아가 드디어 목숨을 끊고 말았다.
예술의 전당 줄리아드에 적을 둔 한 꼬마 학생. 그 애는 지금이라도 뛰어나가 아이스크림을 사먹고 고무줄을 줄기고 싶어하는 충동이 얼굴에 그득한 귀염둥이다. 그러나 그 시간에 피아노를 두들긴다. 그 꼬마에겐 심심찮게 국제전화가 걸려오고, 그때마다 전화 음성은 이 어린 딸이 행여나 상을 탔을까 물어온다.
계속 예선엔 들지만 본선엔 들지 못하던 꼬마는 불현듯 몇 달 전 전화에 대고『엄마, 나 이번에 2등 했어.』
하기야 예선에 든 아이들 중 단 한 명의 협연 자를 뽑았으니 나머지 애들은 모두 2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
얼마 후 나는 이 철부지의 영예로운 2등 입상이 신문지상에 기사화 된 것을 읽었다.
지난 학기말 이런 일도 있었다. 도무지 바보 같지는 않아 보이는 학생이 학점을 구걸해왔다. 두어 마디 이야기 끝에 마음에 없는 전공을 택한 이유를 묻는 내게,『집에서 하라니까 어쩔 수 없어요.』그 학생은 벌레에게 속을 다 갉아 먹히고 껍데기만 남은 고목 같은 모습이었다.
우리 기성세대는 이유야 여하튼 우리가 못 다한 꿈을 다음 세대에게서 구현하고자한다. 과잉사람, 혹은 불순한 사람으로 우리는 얼마나 그들을 구속하며 종종 헤어나지 못할 수령으로 던져 넣고 있는가.
절실한 대답은 준비되어 있다.
경쟁에서 이겨야한다. 일등시민이 되거라. 내가 못다 한 숙원을 너만은 풀어주어야 한다. 그래서 이 아비 에미의 노고에 영광을 들려다오….
이 터무니없는 우리들의 욕심. 이제라도 나부터 버려야했다.
나 하나의 노력이 비록 거센 물살에 휩쓸린 한 삭정이 같이 당장엔 무력해도 좋다. 어쩌면 어딘가 그 탁류 속에서 또 그렇게 떠내려온 잔가지와 어울려 다른 가지를 받쳐주고, 그래서 언젠가는 둑을 이루어 물살을 잠재우게 할 것이다.
그리하여 평탄한 분위기 속에서 부모와 자식간에 사랑과 이해를 나누어보자. 아이들이 아이로서 자라게 하고 각자의 소양을 즐기며, 비록 일등시민이 못되고 남 만한 부자가 못될지라도 마음 편하게 인생을 즐기고 사는 것이 아름답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어야겠다. 그 터전과 풍토를 마련하는 것이 젊은이를 아끼는 우리 기성세대의 도리가 아닐까?

<서울강남구압구정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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