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 베이징회담에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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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
김영희 기자 중앙일보 고문

북한에 대한 이라크 효과는 상반된 두 갈래로 나타났다.

그 하나는 부시 정부가 세계여론의 반대 따위엔 아랑곳하지 않고 이라크를 침공해 전투다운 전투 한번 없이 사담 후세인 정부를 무너뜨리는 것을 본 북한이 이라크 전쟁 중반부터는 눈에 띄게 미국을 자극하는 언행을 자제한 것이다.

그 둘은 정반대로 미국의 막강한 군사력 앞에 북한체제가 맥없이 무너지지 않으려면 핵무기라는 확실한 대항수단을 갖출 필요가 있다는 강한 유혹이다. 이것은 북한에는 생존전략이요, 미국에는 핵확산금지조약(NPT)에 대한 정면 도전이다.

*** 3자대화부터 시작하자는 파월

베이징(北京)에서 열리는 북한-미국-중국 3자회담은 이 둘째의 이라크 효과를 차단하는 긴 여정(旅程)의 첫걸음이다. 북한을 저대로 두면 동북아시아에 핵 보유국이 하나 더 생기는 지각변동이 일어날 것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북한의 핵무장이 한국.일본.중국.대만에 핵 군비경쟁을 촉발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베이징 회담에 한국이 빠졌다고 펄펄 뛰는 사람들에게 3월 중순에서 4월 초 사이에 일어난 일들을 상기시키고 싶다.

미국은 핵추진 항공모함을 부산에 보냈다. 주한 공군력을 강화했다. 북한 전투기가 미군 정찰기에 아슬아슬하게 근접비행을 했다. 주식값과 한국의 신용등급 전망이 떨어졌다.

돈 있는 사람들은 달러를 사 모았다. 모두가 북한이 핵무기 개발의 최종 수순을 밟는 제스처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다행히도 도널드 럼즈펠드 장관을 비롯한 미국 국방부 전쟁론자들이 이라크에 매달린 틈에 콜린 파월 국무장관 일파가 백악관 안보보좌관 콘돌리자 라이스의 동조를 얻어 부시에게서 3자회담의 재가를 받아냈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파월은 베이징과 유엔에서 별로 마음 내키지 않는 중국의 리자오싱(李肇星)외교부장에게 북한을 설득해 일단 대화를 시작하자고 강력하게 다그쳤다. 결국 첸치천(錢其琛)부총리가 평양을 방문해 북한의 동의를 받아냈다.

파월은 3월 말 워싱턴을 방문한 윤영관 외교통상부 장관에게 우선 3자회담부터 대화를 시작하자는 구상을 처음으로 밝혔다. 그때는 아직 부시의 승인이 나지 않았을 때다.

그때 파월은 尹장관에게 보안을 유지해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보안유지 요청의 진원지는 평양으로 거의 확인됐다.

부시 대통령은 럼즈펠드가 참석하지 않은 백악관 안보회의에서 베이징 회담을 승인하고, 파월은 4월 14일 아침 토머스 허버드 주한 미국대사를 통해 그런 사실을 한국 정부에 통보했다.

이라크 전쟁이 럼즈펠드 방식으로 끝나 미국의 전쟁론자들은 지금 기세가 등등하다. 한국의 사활이 걸린 북핵 문제를 다루는 회의에 한국이 빠진 것은 분명히 비정상이다.

그러나 딕 체니-럼즈펠드-폴 울포위츠의 강경라인이 미국의 안보전략을 독점한 지금 북한과 미국이 오랜만에 대화를 재개한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북.미대화가 끊긴 채 북한이 핵 재처리라는 금지선(red line)을 넘고 미국이 럼즈펠드식 대응을 하는 경우를 상상하면 등골이 오싹하다.

*** 南.北.美 협상 통한 해결이 최선

북한은 베이징 회담을 중국이 주선한 북.미회담으로 보고 처음부터 핵 문제를 포함한 본질문제의 토의를 주장할 태세다.

미국은 베이징 회담은 중국이 참가하는 다자회담이고, 본질문제 토의는 앞으로 한국과 일본, 어쩌면 러시아와 유럽연합(EU)까지 참가하는 확대된 다자회담에서 하자는 입장이다.

각국의 이해가 대립할 다자회담에서 북핵 문제의 해결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결국은 다자회담의 명분과 틀 안에서 한국.미국.북한의 거래를 통한 해결이 현실적이다.

대안 없는 베이징 회담 반대는 책임있는 행동이 아니다. 3자회담이 이른 시일 안에 다자회담이 되고, 거기서 남.북.미 협상을 유도하는 데 국민적인 슬기를 모을 때다. 그리고 정부는 구체적인 그림이 잡힐 때까지 '한국의 주도적 역할'이라는 허구(虛構)로 국민을 혼란시키지 말라.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