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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측의 남측 무시가 못내 불안한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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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채인택
채인택 기자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채인택
논설위원

추석 연휴 동안 외신은 온통 중동 뉴스로 시끄러웠다. 잔혹한 무장단체인 ‘이슬람국가(IS)’ 때문이다. IS는 샤리아(이슬람법)가 지배하는 칼리프(정교일치의 군주) 국가를 꿈꾼다. 시대착오적인 목표다. 서방 세력을 악의 근원으로 본다. 민주주의·인권·대화·화해·공존 따위는 배격해야 할 서구 가치일 뿐이다. IS는 서방 기자를 납치해 끔찍하게 살해하고는 그 장면을 동영상 사이트에 올린다. 중세적인 잔혹함에 인터넷을 앞세운 21세기적인 영상·홍보 기법을 이종 결합한 일종의 하이브리드 마케팅이다. 최근 만난 한 대테러전문가는 “‘놀라운 성능’을 강조하는 홈쇼핑채널의 상품처럼 테러라는 상품을 팔고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IS의 무장은 허술하기 짝이 없다. 노획한 경화기로 무장했을 뿐이다.

 문제는 항공모함과 전략폭격기를 갖춘 미국이 이런 IS를 쉽게 뿌리 뽑지 못한다는 점이다. 엄청난 돈을 들인 이라크군이나 쿠르드족 자치군대로도 역부족이다. 이미 천문학적인 전비를 쏟은 미국은 재파병할 수도, 사태를 방관할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이다. 겨우 제한 폭격이라는 어정쩡한 전술로 대응하고 있다. 그것도 단독 작전 대신 여러 나라를 모아 연합군으로서 대응할 태세다. 그래서 미국은 전통적인 유럽의 동맹국은 물론 IS와는 이슬람 종파가 서로 다른 이란, 내부 이슬람 세력의 준동을 우려하는 중국과도 손을 잡을 태세다. ‘적의 적은 친구’라는 논리 앞에 어제의 타도대상이나 경쟁자와도 손을 잡을 수밖에 없다. 예산과 여론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의 곤혹스러운 모습이다.

 이런 상황을 바라보며 북한은 어떤 생각을 할까. IS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미국을 보면서 오판할 가능성은 없을까. 사실 북한은 IS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다. 100만 병력에 대규모 재래식 전력은 물론 연일 여러 종류의 미사일과 장거리 다연장 로켓포까지 쏘아올리고 있다. 아직은 효과적인 발사수단이 없다고 하지만 핵실험도 하지 않았던가.

 최근 대북 군사정보에 밝은 한 전문가를 만났더니 북한의 군사도발이 우려되는 징조가 적지 않다고 우려했다. 가장 걱정되는 게 낌새를 보이지 않고 즉각 우리 측을 향해 사격할 수 있는 포병 전력을 최전방에 대거 배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도발 시 원점을 찾아 제거할 즈음이면 이미 상당한 타격을 입은 다음이 된다. 기습 공격용 경보병도 최전방에 배치 중이며 군 통신선도 이미 대부분 땅에 묻어 감시를 피하고 있다.

 그런 북한이 최근 외교공세를 펴고 있다. 강석주 노동당 국제비서는 베를린·브뤼셀 등 유럽을 돌고 있다. 이수용 외상은 16일부터 다음달 7일까지 열리는 유엔총회에 참석할 예정이다. 북한은 19일부터 다음달 4일까지 열리는 제17회 인천아시아경기대회에 응원단 파견은 접었지만 선수단은 파견한다. 이를 두고 군사 도발 대신 외교전으로 돌파구를 열겠다는 유화 국면으로 해석하는 전문가가 적지 않다. 하지만 최근 만난 한 군사작전 전문가는 “북한이 요즘 발사체를 쏘는 것 말고는 조용한 게 영 마음에 걸린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러고 보니 최근 북한이 한국을 일절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한반도 평화의 ‘중심고리(사물의 현상이나 일의 진행에서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고리를 뜻하는 북한 말)’는 남북대화와 화해인데 이를 도외시하고 외교 노력을 기울인다는 것은 모순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행여나 “이 정도로 노력했는데도 우리를 무시했기에 어쩔 수 없이 군사적인 대처를 할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도발 명분을 축적하기 위한 활동이 아닌가 의심이 가는 것이다.

 가난하고 힘없는 북한이 무슨 도발을 할 수 있을까라며 비웃는 사람도 적지 않다. 하지만 IS 사례는 도발은 돈다발로 하는 게 아님을 잘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최고의 군인과 훈련·무기·조직·작전으로 몇 세기간 지중해 일대를 석권했던 로마도 가난한 야만족인 게르만족에게 유린당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국민과 국가·국토를 방어하는 데 필요한 것은 돈다발이 아니라 철저한 대비태세임을 생각해야 한다. 튼튼한 안보태세는 남북 대화와 협력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채인택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