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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할머니 31명이 오순도순|경주시「나자레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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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경주=이석구 기자】경북 경주시 구정동 616의51 「귀국자료 나자레원」(이사장 김용성·64)-.
오갈 데 없는 일본인 할머니들 31명을 모아 보호하고 없어진 호적 등을 찾아 귀국을 주선해 주고 있는 곳이다.
잔디밭에 둘러앉은 국 태생이의 할머니들은 동네꼬마들의 재롱에 한때나마 시름을 잊고 동심에 젖어 있다.
『잘한다, 잘해. 이겨라, 이겨라. 기레이-.』
우리 말과 일본말이 뒤섞인 말로 할머니들은 꼬마들의 씨름을 응원하고 있다.
『한국인 남편 따라 왔다가 홀로된 일본부인이 현재 전국에 1천명쯤 됩니다. 이중 3백여 명은 노동능력이 없는 60세 이 상된 할머니로 생활보호가 시급한 사람들입니다.』
나자레원 우호영 상무(64)는『36년간 박해를 했던 일본인이기에 이들은 피해자이면서도 하소연도 못하고 잊혀진 존재로 버림을 받아 왔다』며 이들의 딱한 처지를 동정했다.
나자레원이 문을 연 것은 72년 10월1일.
현재 앞을 못 보는「야마사끼」(71)부인 등 31명이 수용돼 있고 전국에 흩어져 있는 90여명에게 일본기독교단체후원으로 매달 생활비를 보조해 주고 있다.
지금까지 1백 명을 직·간접으로 도와 일본으로 귀국시켰다.「가네다·가요」부인은 사망신고로 무적자가 돼 법정투쟁을 벌이고 있다.
43년 요리사로 일본에 갔던 조 모씨(사망)와 결혼, 44년 조씨와 함께 이 땅에 왔다.
6년간 같이 잘살았으나 조씨가 다른 여자와 함께 도망하는 바람에 긴 수난의 생활이 시작됐다. 식모 살이·막노동으로 겨우 입에 풀칠을 해 왔다. 10년 전 도저히 혼자 살 수 없어 귀국을 결심한「가네다」씨는 귀국절차를 밟으려고 그동안 잊었던 호적등본을 떼보니 사망신고가 되어 있었다.
조씨가 후처와 혼인신고를 하기 위해「가네다」씨를 마음대로 죽인 것이다.
「가네다」씨는 법원에 복적 소송을 냈으나 유일한 증인인 조씨마저 사망,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대법원에서까지 기각됐다.
일본호적에는 출가로 말소됐고 한국호적에는 사망자로 처리된「가네다」씨는 79년 7월부터 이곳 나자레원에서 한 많은 여생을 보내고 있다.
나자레원에서 이들 수용할머니들에게 주는 음식은 거의 한국음식. 그러나 그들의 식성에 맞도록 약간 일본화 되어 있다.
김치에 고추를 넣지 않는 다든 가 반찬에 설탕을 많이 쓴다. 1주일에 한번씩은「세끼항」이라는 찹쌀·붉은 콩·붉은 팥을 섞은 특식을 제공한다.
할머니들이 즐겨 먹는 것은「모찌」(찹쌀떡)와 초밥. 일본명절날인 신정·단오 때는 의례 껏 생선·김 초밥과 찹쌀떡을 푸짐히 대접한단다.
현재 일본과 정기적으로 연락을 하는 연고자는 3∼4명.『죄가 있다면 한국인을 사랑한 죄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일본인이었기에 죄인처럼 살아야 했습니다.』이곳에 있는 대부분이 30년 이상 막노동과 식모 살 이로 전전하다 양로원 신세를 지고 있다.『이것도 일본인의 업보인가요』라며 눈물을 짓는다.
이들은 별의별 고초를 다 겪은, 깊게 주름진 인생이나마 여생을 고향에서 보내겠다고 나자레원에서 각계의 관심 어린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하나 하나가 모두 한편의 드라마틱한 소설인생들이다.
해방된 지 36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건만 일제 36년의 상흔은 가해자였던 일본인에게도 아직 상처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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