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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애국가의 조옮김, 아무 문제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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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류재준
작곡가

애국가의 조옮김 문제로 시끌시끌하다. 원조보다 3도나 아래로 조옮김해 원곡이 가진 힘이 떨어져 버렸다는 주장과 쉽게 부를 수 있어 좋다는 의견이 갈리고 있다. 전교조가 일부러 애국가를 기피하기 위한 전략이고 애국가를 폄훼하려는 좌파의 시도라는 의혹까지 나온다. 전교조와 좌파의 폄훼 의도였다는 주장은 애국가의 조를 바꾸려는 시도가 그전 보수교육감에서 시작됐다는 사실이 밝혀진 후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다. 하지만 원곡의 정서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는 조옮김은 용납할 수 없다는 주장이 점차 힘을 얻고 있다.

 안익태가 한국환상곡을 작곡했을 당시 이 작품의 원조는 가장조다. 전문 음악연주단체를 고려해 작곡된 곡이니 만큼 보다 화려하고 힘찬 분위기를 위해 높은 음역을 쓰는 것은 당연한 작곡가의 선택이다. 그렇기 때문에 원조를 그대로 가져온 애국가는 전문 성악인이 아닌 일반인이 부르기엔 무리가 간다. 파사지오(Passaggio)라는 전문용어는 성악가들과 성악 작품을 쓰는 작곡가들이 필수적으로 알아야 할 중요한 기술이다. 소리 내는 음역이 어느 순간 다른 발성 부위를 쓰면서 소리가 변하거나 문제가 생기는 것을 자연스럽게 연결해 균일하게 고운 소리를 내는 기법이다. 하지만 이런 기술은 전문적으로 훈련돼 있는 가수들이 아니고서는 대부분 쓰기가 쉽지 않다. 개인마다 차이가 있지만 베이스는 가온(피아노 건반의 한가운데) 도부터 한 옥타브 위, 바리톤은 한 옥타브 위에서 장단 3도 정도, 테너는 바리톤보다 한두 음정 위에서 문제가 나타난다. 대부분의 남성이 베이스와 바리톤 음역이므로 당연히 최고 음이 미가 되는 가장조로 된 애국가는 부르기 힘들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어린이와 어르신들이다.

 이미 오랜 시간 동안 일선 학교들, 특히 초등학교에서 애국가의 음역으로 인해 상당히 곤혹스러운 경우를 토로하는 교사들이 많았다. 아이들이 높은 음역을 감당하지 못해 도저히 애국가를 제대로 가르치기 힘들다는 일선 교사들의 문제 제기가 받아들여져 1955년 애국가의 조성을 사장조로 조내림해 쓰기 시작했다. 지금 흔히 보이는 사장조의 애국가는 이때 시작된 것이다. 굳이 이번에 사장조보다 더 낮은 바장조로 바꾼 것은 보다 많은 이가 편안하게 애국가를 부를 수 있게 하려는 시도였다고 한다. 나이가 들면 어쩔 수 없이 부를 수 있는 음역도 내려가기 마련이다. 쉽고 편하게 부를 수 있는 애국가가 필요한 이들이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애국가의 조옮김이 과연 이렇게 많은 이가 갑론을박을 할 만큼의 문젯거리가 되느냐는 거다. 파바로티의 경우는 자신의 콘서트에서 오페라 아리아지만 일부러 투란도트의 아리아를 한 음 높게 부르기도 했고 예술가곡의 대부분은 고음용·저성용이라는 이름으로 조를 바꿔 각기 다른 음역의 가수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다. 필자가 과문한 탓일지 모르지만 아직까지 한 번도 이런 시도들을 두고 원곡에 대한 모독이라든지 훼손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특히 애국가는 누가 뭐라고 해도 가사가 중요하다. 처음 애국가의 가사가 만들어진 후 오랜 기간 동안 스코틀랜드의 민요에 덧입혀 불렀다는 것은 음악적 내용이 문제가 아니라 가사의 내용이 우선했다는 중요한 방증이다. 애국가는 우리가 같은 나라 사람이라는 자긍심과 공동의식을 고취하려는 중요한 예법 중 하나다. 애국가는 예술가곡도 아니고 오페라의 아리아도 아니다. 목에 핏대를 세우고 부르기보다 안정되게 가사를 음미하며 부르자는 시도인데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알 수가 없다.

 미국 국가는 절망적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넓고 높은 음역 때문에 악명이 높다. 그래서 그들은 많은 변형과 조옮김을 통해 자유롭게 그들의 국가를 노래한다. 야구장에서, 집회장에서 자유롭게 국가를 변주하고 즐긴다. 러시아의 국가는 낮은 저음으로 만들어진 전투적이면서도 강렬한 행진곡이다. 오히려 한국의 애국가와는 반대로 여성들이 부르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이들은 미국과는 반대로 국가에 대한 변형을 용납하지 않는 편이다. 사회의 건강함과 탄력이 이런 부분을 통해 드러난다고 하면 과장일까.

 아무래도 원곡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를 짜내더라도 크게 부르는 노래가 용맹하고 기백이 넘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만약 잘만 할 수 있다면 그렇게 부르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런데 정말 기백이 넘치게 부르려면 왜 더 높여 부를 생각은 안 하는지 모르겠다.

 한 가지 첨언한다면 사실 바장조는 그렇게 처지거나 어둡지 않은 조다. 많은 행진곡이나 흥겨운 춤곡이 바장조로 쓰여 있다는 것을 봐도 그렇다. 신비롭고 흥미진진한 베토벤의 전원교향곡이 바장조다. 정세문이 작곡한 어린이 행진곡도 바장조다. 바장조가 단조성을 띤다는 주장은 모든 조성이 단조성을 포함하고 있다는 당연한 상식을 의도적으로 왜곡한 거다. 왜 애국가의 조성이 엉뚱하게도 논쟁의 중심에 서게 됐는지 알 수가 없다.

류재준 작곡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