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방학을 은행 안내원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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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유난히도 더운 여름.
여름이 들끓고 있다. 작렬하는 태양아래 다른 친구들은 무엇을 하고 있으려나?
바다를 향해 떠난 이들은 그들의 종착역에서 갈매기 떼와 어우러진 바다를 감상하고 있을게고, 도서관의 고시파들은 좀더 책과 가까워지려고 안경 돗수를 높이고 있을게다. 그리고 해외나들이란 행운(?)의 소수파들은 짧은(?)방학 기간을 한탄하고 있을게다.
그러나 그들이 새로운 경험을 하는 만큼 방학중의 아르바이트도 내게는 값진 고충 뒤에 따르는 보람을 안겨준다.
그래서 다른 젊음들이 비운 이 도시 안에서 은행 현관의「안내」라는 책상을 지키고 있다.
낯선 곳에 익숙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낯선 책상에, 낯선 얼굴들에, 낯선 업무에 익숙하는데는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아마추어 은행 안내원의 노력으로. 새로운 고객이 늘고 그러면서 이곳에 정이 붙는다.
두 서너번 납부 고지서를 들고 들어섰을 뿐이던 은행에서 업무를 맡는다는 것은 일의 경중을 떠나 그림으로만 보던 바다를 직접 보는 듯한 설렘이 있다. 이렇게 시작한 내 짧은 일거리가 이젠 흥미나 두려움이 사라지고 익숙해진 것이 대견스럽다. 결국 이렇게 해서 또 하나의 새로운 경험이 내 안에 자리잡게 된 셈이다.
물론 안내라는 일이 사람사이에 부대끼는 일이라 하루 종일 응답하고 종종걸음을 치다보면 흐느적거리는 해파리처럼 집 앞에 당도하곤 한다. 더구나 찌는 듯한 전철 속의 역겨운 땀내음은 아침부터 나를 속상하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30도를 넘는 무더위가 사흘째 계속되던 날 은행 문을 들어선 아버지뻘 되는 손님이 내게 하신 말씀은 이런 사소한(?) 고충마저 들먹이는 나를 납작하게 만들었다.
『에어컨 바람 속에 일하는 자네, 복 받은 사람이야. 지금 밖이 얼마나 더운지 아나?』
여름이 끝날 때 정겨운 얼굴들이 수련의 고장으로부터 나름대로의 성숙을 안고 이 도시에 돌아오는 날, 나 또한 뿌듯한 보람을 안고 마지막 이 은행 후문을 나서기를 노력할 뿐이다.
이인종
▲77년 이화여고 졸 ▲경희대 가정관리학과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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