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나를 흔든 시 한 줄

신경림 시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8면

동영상은 joongang.co.kr

은하 푸른 물에 머리 좀 감아 빗고

달 뜨걸랑 나는 가련다

목숨 수(壽)자 박힌 정한 그릇으로

체할라 버들잎 띄워 물 좀 먹고

달 뜨걸랑 나는 가련다

삽살개 앞세우곤 좀 쓸쓸하다만

고운 밤에 딸그락딸그락

달 뜨걸랑 나는 가련다

- 이병철(1921~95) ‘나막신’

‘가련다’가 연거푸 반복되어서일까. ‘달 뜨걸랑’이 풍기는 여운 때문일까. 그도 아니면 ‘딸그락딸그락’이 남기는 잔향 덕일까. 이 시를 읽으면 손에 잡히지는 않지만 뭔가 아름다운 세계가 생각난다. 고등학생 때 이 시를 처음 읽고 바로 암기하곤 지금까지 때로 외우곤 하는 까닭이다. 암송하면 마음이 고요해진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해방을 맞고 한국전쟁을 겪으며 젊은 시절을 그야말로 격변의 다툼 속에 살았다. 너무 처참하고 각박해서였을까. 이렇게 고운 시를 읽고 있으면 아름다움이야말로 상처 받고 힘들게 살아온 사람들의 더 없는 치유제구나 싶다. 진선미(眞善美)의 가치 중 선이란 것이 무엇이고, 미란 것이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는가, 곰곰 들여다볼 때가 있다. 그럴 때 ‘나막신’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다.

 이병철 시인은 1943년 등단한 뒤 이화여중 교사로 일하다 1950년 가족과 함께 월북했다. 서울 거리를 방황하던 한센병 환자 한하운(1920~75)을 등단시켰다. 백석(1912~96), 이용악(1914~71)과 더불어 오랫동안 한국 문학사에서 잊혀졌던 시인의 이름을 여기 되새긴다. 신경림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