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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이 문제] 천안 남부아파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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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각한 결함이 발견돼 사용하지 말아야 할 건물에서 주민들이 10년째 살고 있다.

건물을 다시 짓거나 긴급 보수·보강이 필요한 재난위험시설물이 천안 지역에 63개 동이나 있다. 주민 안전에 빨간불이 켜졌지만 대부분 민간 개발에 의존해야 하는 주택·상가여서 지방자치단체도 뾰족한 대책이 없다. 위험한 거주를 하고 있는 주민들을 만났다.

글=강태우·이은희 인턴기자 , 사진=채원상 기자

천안시 성정동에 있는 남부아파트는 2004년 안전진단 최하 등급인 E를 받아 재난위험시설물로 분류됐다. 하지만 지금까지 아무런 조치 없이 방치되고 있다.

지난 2일 오후 한가위를 일주일 앞둔 천안시 성정동에 있는 남부아파트엔 인기척 하나 없이 조용했다. 1동부터 8동까지 모두 낡은 아파트는 당장이라도 무너져내릴 듯했다. 콘크리트 벽면과 내부 계단은 금이 가 있었다. 균열이 심해 철근이 드러날 정도였다. 아파트 창문 유리는 오래전 깨진 듯 유리 사이에 먼지가 잔뜩 끼었다. 깨진 창문 아래 바닥엔 유리 조각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분위기를 더욱 을씨년스럽게 만든 건 불빛 하나 없는 캄캄한 건물 내부를 둘러싼 넝쿨이었다. 아파트 벽면을 타고 뻗은 넝쿨은 맨 꼭대기 3층까지 넓게 퍼져 있었고 현관 입구 전체를 막아 출입을 방해했다. 페인트칠이 벗겨진 벽면엔 지저분한 낙서가 가득했다. 건물 지하통로와 연결되는 계단에는 쓰레기가 쌓였다. 굳게 닫힌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이불·가전제품·수납장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버려져 있었다. 빈 집의 방엔 더러운 이불과 깨진 술병들이 널브러져 있고, 천장에는 큰 구멍이 나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했다.

돈 없어 떠나지 못하는 주민들

자유시장 전경.

1984년 지어진 이 아파트는 2004년 천안시가 시행한 안전진단에서 최하위인 E등급을 받아 재난위험시설물로 분류됐다. E등급은 심각한 결함으로 사용을 금지하고 보강 또는 개축을 해야 하는 상태를 말한다. 안전에 위협을 느낀 주민 몇몇은 오래전 이사를 갔지만 일부 주민은 하루하루 불안한 마음으로 ‘위험한 거주’를 하고 있다. 현재 108가구 가운데 12가구가 떠나지 못하고 있다. 대부분 형편이 어려운 독거노인이나 노숙자, 일용직 근로자다. 이곳에 사는 박옥순(가명·80)씨는 폐지를 주워 팔아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빗물이 새유. 위험하면 어때유? 다른 데루 이사가라구 했는디 다들 돈이 없응께 사는 거쥬. 나이도 많이 먹었는디 남의 집에 월세 내면서까지 갈 수 없슈.”

화재 위험도 우려돼 얼마 전에는 관리사무소에서 집집마다 소화기를 한 대씩 나눠줬다. 주민 김경자(57·가명)씨는 이사갈 생각이지만 이사 비용이 없어 내년으로 미뤘다. 김씨는 “얼마 전 앞 동에선 노숙자들이 술을 마시고 난동을 부려 경찰이 온 적도 있었다”며 “근처 분위기나 환경이 우범지대여서 무섭고 걱정된다”고 말했다.

남부아파트 인근 주민들도 골머리를 앓고 있다. 아파트 근처에 사는 신준수(54)씨는 “아파트가 흉물 같아 낮엔 사람들이 가까이 가기 무서워할 정도고, 밤엔 중·고교생들의 비행 장소가 되고 있다”며 “노숙자들이 몰래 들어와 살기도 하고, 막노동 일꾼들이 옥상에서 술판을 벌인다”고 말했다. 또 “장마철엔 아파트 입구에 쌓인 쓰레기가 옆에 있는 하천으로 흘러들어가 악취가 난다”고 하소연했다. 아파트 주변엔 가로등이 없어 더욱 음침한 분위기다.

안전진단에서 D등급을 받은 자유시장도 상황은 비슷하다. 천안시 성황동에 있는 자유시장은 예전엔 많은 시민이 찾던 상가였지만 지금은 사람 발길조차 끊긴 폐허로 전락했다. 1층 상가 건물은 대부분 굳게 문이 잠겨 있었고, 2층 단칸방은 불빛 하나 없어 음침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콘크리트가 부서진 바닥은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이곳에서 40년간 방앗간을 운영하고 있는 김종호(77)씨는 “전에 불이 난 뒤 원래 살던 사람들은 다 빠져나가고 지금은 집 없고 돈 없는 떠돌이들이 들어와 산다”며 “전기와 수도가 끊겨 임시로 끌어다 쓰는 등 위험하지만 나가고 싶어도 돈 없는 사람들은 엄두를 내지 못한다”고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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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등급 받은 자유시장은 폐허 방불

천안 지역에서 안전상 문제가 발견돼 긴급 보수·보강해야 하거나 새로 건물을 지어야 하는 D·E등급 건축물 63개 동 가운데 마땅한 해결책이 없는 곳은 남부아파트 8개 동과 자유시장 3개 동, 우경빌라 2개 동이다. 50개 동이 밀집한 천안 신부동 주공2단지 아파트는 재건축을 할 예정이다. 남부아파트도 하루 빨리 재건축을 해야 하지만 10년째 지지부진하다. D·E등급을 받은 교량이나 옹벽 같은 시설물은 지자체가 예산을 투입해 보수나 신축이 가능하지만 민간 주택은 지원 근거가 없어 손을 놓고 있다. 해빙기나 우기 때 지자체가 월 2회 건물의 노후 상황을 파악하는 정도가 고작이다. 더욱이 소규모 주택단지는 ‘시설물안전관리에 관한 특별법’에 규정된 주요 시설물에도 해당되지 않아 한국시설안전공단의 시설물 안전등급 정보 공개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

백낙원 남부아파트 재건축정비사업조합장은 “재건축을 허가받은 상태지만 9년 동안 시공사가 4~5차례 바뀌어 업체 선정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시공사들이 재건축해도 돈이 안 될 것 같으니 계약하지 않는다. 시공사가 정해지면 가계약을 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우권 천안시 도시재생팀 주무관은 “남부아파트는 2011년 재건축사업 시행인가를 받은 상태지만 지금까지 시공사가 선정되지 않아 공사를 못하고 있다”며 “재건축을 추진하는 조합이 관리처분계획을 세워 시에 신청해야 하지만 아직까지 이행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시 소유가 아닌 건물을 마음대로 철거나 재건축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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