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2)|제74화 한미 외교 요람기 (18)|한밤의 국무성 방문|한표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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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차창에 비친 워싱턴의 초여름 밤이 유난히 무덥게 느껴졌다. 이승만 대통령과 신성모 국방장관이 그토록 경고해 마지 않았던 전쟁은 터지고 만 것이다.
이제 나의 머리는 암담한 기분과 함께 미국이 어떻게 나올 것인 가로 꽉 찼다. 혼자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해보았다.
「트루먼」 대통령과 「애치슨」 국무장관이 평소에 한 말 중 우리에게 희망적인 것을 골라 상장도 해보았다. 「트루먼」 대통령은 50년5월9일 와이오밍주의 한 연설에서 『공산주의는 악의 복합체이고 가장 새로운 폭정 체제 (Newest Form of Tyranny)이며 자유와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고 있다』면서 『소련의 팽창주의에 시달리는 자유 진영은 미국을 쳐다보고 있으며 미국은 자유 진영의 원칙과 주의·주장을 보존하는데 강력한 역할을 해야할 것』이라고 말했었다.
또 「애치슨」 장관은 3월20일자 국무성 블리턴에서 『자유 진영이 약점을 보이면 정치적 진공 상태가 생길 것이고 이를 소련이 들어와 채울 것이라는 전제하에 미국의 외교 정책은 어디까지나 힘의 입장 (Position of Strength)에서 자유 진영을 붕괴시키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밝힌 적이 있었다.
만약 미국의 기본 입장이 그럴진대 어쩌면 미국이 궁극적으로는 한국을 돕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밤 10시쯤 대사관저에 도착했다. 장면 대사에게 전화로 보고한 내용을 자세히 되풀이했다. 장 대사와 나의 표정은 바로 「침통」 그것이었다.
장 대사가 국무성에 다시 전화를 걸어보라고 했다. 앞서 통화했던 당직 직원이 나왔다. 「나일스·본드」를 바꿔주었다.
「본드」는 『장 대사가 계시냐』고 묻고는 급히 두 사람이 국무성으로 와달라고 했다. 장 대사와 내가 국무성에 도착한 것은 밤 10시40분께였다.
국무성에는 「딘·러스크」 극동 담당 차관보, 「애치슨」 장관의 고문이며 순회 대사인 「필립·제섭」 박사 (전 콜럼비아대 법률학 교수), 「존·히크슨」 유엔 담당 차관보, 「앨릭시스·존슨」 동북아과장 (일본 담당), 「나일스·본드」 한국 담당관이 나와 있었는데 모두 턱시도 (연미복) 차림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날 밤 그들은 한 국무성 관리의 결혼 기념일 파티에 참석했다가 비상 소집돼 달려온 것이었다.
「러스크」 차관보가 장 대사와 나를 밀실로 안내했다. 『방금 「무초」 대사로부터 전보가 왔는데 북한이 남침한 것이 사실』이라고 밝히고는 『한국 정부에서 무슨 연락이 있는가』고 물었다.
장 대사는 『없다. 당신네들이 우리를 도와주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러스크」 차관보는 『우리 나름으로 대책을 생각하고는 있으나 아직 말할 단계는 아니다』며 『서울의 대사관으로부터 자세한 보고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데 한국 정부로부터도 무슨 연락이 있으면 알려 달라』고 했다.
우리는 『그렇게 하마』고 약속하고 밀실을 나왔다. 장 대사와 나는 아까 들어올 때 복도에 서있던 기자들을 생각하고 잠시 질문이 있으면 어떻게 답할 지를 상의했다.
우리들이 만든 답변 내용은 ▲북괴의 침범은 우리의 도발 없는 침략 행위 (Unprovoked Aggression)이다 ▲그 배후에는 소련이 있으며 모든 전쟁 계획·조정·지원을 소련이 했다▲미국은 시급히 군사적 직접 원조를 해야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기자들의 질문에 이같이 대답하고 밤 12시쯤 대사관으로 돌아왔다. 우리들이 잠시 얘기를 나누자 전화벨이 울렸다. 경무대로부터 온 국제 전화였다.
내가 수화기를 들었다. 틀림없는 이승만 대통령의 목소리였다. 주변에 들리는 소리가 많은 것으로 보아 긴급 국무회의가 경무대에서 열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짐작되었다.
이 대통령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필립」, 어떠냐. 저 놈들이 쳐들어왔어. 우리 국군은 용맹스럽게 싸우고 있다. 그러나 우리 힘으로 격퇴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결심과 각오를 가지고 있다. 어떻게 하든 미국의 원조가 시급히 도착하도록 적극 노력해야겠다. 장 대사 있느냐.』
74세 노인의 목소리치고는 힘이 있었다. 나는 대충 이 대통령의 목소리로 희로애락의 감정을 알아차릴 수 있었는데 그의 음성에는 분명히 자신감이 엿보였다.
장 대사가 전화를 받았을 때도 같은 요지의 지시가 있었다. 이것이 이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최초의 통신이었는데 이 대통령은 통화의 끝머리에 『정일권 장군과 손원일 제독에게 빨리 귀국하라고 그래』라고 일렀다. 당시 정 장군과 손 제독은 워싱턴에 무기 원조를 교섭하러 왔다가 귀로에 하와이에 체재 중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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