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상병 치료하다 피난도 못 가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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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내가 세브란스 간호 학교를 졸업한 것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3년. 졸업과 동시에 세브란스 병원에 발령 받아 1년 남짓 근무했다. 그때가 진짜 초년병 생활인 셈이지만 그보다는 결혼과 함께 간호원을 그만두었다가 해방 후 1948년 서울 시립 시민 병원에 다시 간호원으로 들어가 6·25를 겪었던 수년 동안이 가장 기억에 남는 시절이다.
서울 시립 시민 병원은 현재의 국립의료원 자리에 있었다. 의료 기관이 많지 않았던 당시에는 서울에서 손꼽을 만한 병원으로 늘 환자가 밀렸다. 함께 일하던 간호원이 70∼80명. 정규 간호 학교를 마친 사람은 많지 않았다. 나는 곧 부 간호 과장의 중책을 맡게 됐다.
해방의 감격 속에 이북에서 월남한 실향민이었던 나는 어렸을 적부터 꿈꾸던 「남을 위해 봉사하는 즐거움 속에 하루하루를 살았다. 의사도 모자라고 약품도 모자라고 모든 것이 부족한 것뿐이었지만 새 나라를 세운다는 벅찬 감격과 희망이 우리 모두를 피곤도 모르고 일하게 했다.
그러나 조금씩 자리가 잡혀갈 무렵 6·25가 터졌다. 일요일인 그날 나는 모처럼 집에 있다가 병원과 환자들 일이 궁금해 남들은 피난을 간다는데 거꾸로 병원에 나갔다. 부상병들이 속속 밀려들고 있었다. 일부는 피난길을 떠나고 일부 남은 간호원들과 밤새 이들을 간호하다 피난길을 놓치고 9·28 수복 때까지 공산 치하를 겪게 됐다.
저들도 의사·간호원은 필요했던지 병원 일을 계속하게 했다. 수복 직전 패주를 앞두고 저들의 처형 음모를 귀뜀 받고 구사일생으로 탈출, 숨어있다 수복을 맞았다.
해방에서 6·25가 끝날 때까지 격동의 시기. 내 간호원 생활의 초년기를 돌이켜보면 순수한 봉사의 일념으로 젊음을 바쳐 땀 흘린 시절이었다고 기억된다. 전쟁터에서 부상을 하고 피를 흘리며 쏟아져 들어오던 그 많은 젊은이들.
요즘 같았으면 목숨을 건졌을 수많은 젊은 생명이 안타깝게 죽어 가는 것을 보며 눈물도 많이 흘렸었다. 그리고 더욱 하나님에의 믿음이 굳어갔다.
이후 33년 나는 병들어 고통받는 내 형제 자매의 곁에서 늘 이 믿음과 사랑을 다짐하며 살아왔다. 이성옥 <고려병원 간호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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