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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 사유 서너개 고르라는 비인간적 땜질 처방” 비판 잇따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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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말 이혼한 외국계 기업 여성 임원 K씨(47)에게 최근 서울가정법원이 만든 이른바 ‘객관식 이혼 소장’을 보여주며 이혼 청구 사유 중 그의 전 남편에게 해당됐던 것을 골라봐 달라고 부탁했다. K씨는 37개의 보기를 보며 하나씩 체크해 나가기 시작했다. 배우자 아닌 자와의 성관계, 가출, 잦은 외박, 폭행, 욕설ㆍ폭언, 무시ㆍ모욕, 도박, 사치ㆍ낭비, 가정에 대한 무관심, 애정 상실, 대화 단절, 과도한 음주. 총 12개 항목이 선택됐다. 그 중 새로운 형식의 이혼 소장에 적혀 있는대로 ‘결정적인 사정 3개 또는 4개’로 선택지를 좁혀달라고 다시 얘기했다. K씨의 시선이 12개 항목을 한참 동안 오르내렸다. “이걸 어떻게 서너개로 줄이나 ….” 그는 난감해 했다.

K씨의 이혼 배경이 아주 유별난 것은 아니었다. 대기업에 다니다 10년 전쯤 퇴사해 통신장비 개발 사업에 뛰어든 전 남편은 여러 차례 외도를 들켰고, 이 때문에 부부싸움이 자주 벌어졌다. 이혼 직전에는 거의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자녀 교육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룸살롱ㆍ골프 여행ㆍ카지노 도박을 좋아했다. 주변에서 종종 들을 수 있는, TV 드라마 ‘사랑과 전쟁’의 소재도 되기 어려울 정도의 비교적 흔한 스토리였다. 그런데도 객관식 소장의 보기 선택이 쉽지 않았다.

서울가정법원이 다음달 1일부터 시범 도입키로 한 객관식 이혼 소장을 둘러싼 논란이 뜨겁다. 법조계와 관련 분야 전문가들이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있다. 서울지방변호사회는 ‘고식지계’(姑息之計ㆍ당장의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한 잔꾀)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법원을 비판했다. 법원 측은 이에 대해 “사건 수임이 줄어들 것을 우려한 변호사들의 집단 이기심이 작용한 것”이라며 불쾌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변호사회 “때리지 말고 권투하라는 것”

37개의 보기 중 서너개를 선택하도록 돼 있는 새 소장의 도입 취지에 대해 서울지방법원은 “갈등의 증폭을 방지하자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기존의 ‘서술형 소장’에 배우자의 잘못을 낱낱이 들춰내 적다보니 이를 받아보고 모욕감을 느낀 상대방이 공격과 비난의 반격에 나서고, 결국 ‘난타전’이 벌어져 서로 지나치게 상처를 입는 일이 많다는 얘기다. 그래서 소장에는 청구 사유를 간략하게 표시하고, 상대가 이를 수긍하지 않는 경우에만 소송 진행 과정에서 구체적인 문제들을 확인해보자는 것이다.

하지만 서울변호사회는 객관식 소장 양식 공개 다음날인 23일에 낸 논평에서 “서울지방법원은 기존 이혼 소송이 상호비방으로 얼룩졌던 원인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새로운 가사소장 모델 도입에 반대한다”고 밝혔다. 이 단체는 “서술형을 객관식으로 바꾼다고 해도 상대방 배우자가 자신의 귀책사유를 인정하지 않으면 답변서나 재판 준비서면 단계에서 곧바로 갈등 표출이 될 수밖에 없다. 객관식 소장은 이를 잠시 미루는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갈등이 심해지는 근본 이유는 우리나라 민법이 채택하고 있는 ‘유책주의’ 때문인데, 소장을 바꿔서 이를 막겠다는 것은 고식지계에 불과하다”고 덧붙였다. '언발에 오줌누기'식 땜질 처방이라고 표현한 변호사도 있다. 나승철 서울변호사회 회장은 “다소 극단적으로 얘기하면 권투시합 같은 제도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서로 때리지는 말라고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유책주의’는 한쪽 배우자가 결혼 생활을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의 행동을 했을 경우에 한해 상대 배우자가 이혼 소송을 청구할 수도 있도록 만든 제도다. 이와 달리 어느 쪽에 책임이 있느냐를 떠나 결혼 생활이 사실상 파탄에 이르렀음이 인정되면 법원이 이혼을 허락해주는 제도를 ‘파탄주의’라 일컫는다. 미국ㆍ영국ㆍ독일 등 서구 국가는 대부분 이를 채택하고 있다.

판사들 “수입 감소 우려로 변호사 반발”

새 이혼 소장에 대한 비판은 학계에서도 나온다. 차선자 전남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취지는 이해 되지만 과연 서너개로 이유를 쉽게 고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 식으로 생각을 정리하라는 것은 법원이 청구인의 인격을 존중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도 있다”고 말했다. 익명을 원한 변호사 출신의 한 교수는 “물론 이혼 소송은 아름다울 수가 없는 일이지만 부부의 삶과 감정이 복합적으로 응축된 결혼 생활을 정리하고자 하는 이에게 선택지를 던지고 그 중에서 이유를 몇 개 고르라는 것은 사람에 대한 배려 측면에서 바람직하지 않다. 갈등의 상황을 충분히 정리해주기보다는 합의로 쉽게 마무리를 유도하려는 법원의 편의주의적 발상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든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서울가정법원의 김성우 공보판사는 “변호사회 등에서 오해하고 있는 측면이 있다. 새 소장이 시범적으로 도입돼도 기존의 서술형 소장으로 재판을 청구할 수 있다. 새 모델에는 부부 양쪽이 이혼에 대한 기본적인 합의는 이뤄진 상태에서 재산분할이나 양육권 문제 정도에만 이견이 있는 경우에 소장을 간략히 작성할 수 있는 등의 장점이 많다”고 반박했다. 이 법원의 한 판사는 “소장 작성이 쉬워져 이른바 ‘나홀로 소송’을 할 사람들이 늘어날 것을 예상해 변호사들이 반발하는 측면도 있다”고 주장했다. 새 소장 모델 개발에 참여한 이명숙 한국 여성변호사회 회장은 “소장에 사유를 자세히 적다보면 싸움이 커져 소송이 오래간다. 나는 10여 년 전부터 아주 간략하게 요지만 소장에 적어왔다. 그랬더니 대체로 다른 변호사들보다 오히려 소송을 일찍 원만하게 끝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혼 제도 전반적 개선 필요 주장도

찬반 양론 중 어느 쪽이 옳으냐를 떠나 이번 일을 우리 나라의 이혼 제도의 적합성을 따져보고 잘못된 부분을 고치는 계기로 삼자는 의견도 있다. 유책주의의 한계와 파탄주의의 장점을 다시 한번 진지하게 살펴보자는 주장이다. 서울가정법원에서 조정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조경애 한국가정법률상담소 법률구조 부장은 “법원도 점차 피고의 잘못을 일일이 확인하는 것보다 재산분할이나 자녀 양육의 문제 등 현실적 문제에 초점을 맞춰 조정이나 화해로 소송을 마무리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번 소장 변경도 그런 흐름 속에서 나온 일로 풀이된다”고 말했다. 그는 “이혼 관련 법 개정, 이에 따른 대법원 판례의 문제를 놓고 본격적으로 사회적 공론화 작업을 벌일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이상언 기자 [joonn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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