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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년만 아내품에 돌아온 무기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부처님 탄생하신 4월초파일 무기수 남편과 그아내에겐 제2의 삶이 탄생되는 축복의 날이 되었다.
무기수였던 김정수씨(45·중앙일보80년7윌5일자보도)가 석가탄신일 특별가석방으로 11일서울영등포교도소를 출감, 옥바라지 18년의 아내에게 돌아온 것이다.
『여보…』남편을 부르는 서미혜씨 (42·서울신포동31)의 목소리가 떨렸다.
어깨를 들먹이며 흐느끼는 아내의 등을 쓰다듬는 김씨의 두눈에선 하염없이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감옥에 들어갈때 20대 초반의 곱던 아내가·흰머리와 주름살이 덮인 중년이 됐다. 난지40일밖에 안됐던 핏덩이 딸도 벌써 여고3년생.
『오늘은 재가 다시 태어난 날입니다. 저의 재생은 모두 아내의 고생과 정성입니다.』
결혼 20년만에 마음놓고 잡아보는 아내의 손이었다.
김씨가 18년동안 갇혀있어야 했던 일을 저지른 것은 63년 6월, 그의 나의 27세때였다. 첫딸을 낳고 몸조리중이던 아내 서씨를 위해 먹을 것을 구하러 나간 것이 부부의 마지막이었다.
당시 천안에서 손꼽히는 부농집안의 둘째아들이었지만 계모의 구박으로 집의 도움을 한푼도 받지 못한채 신호초부터 끼니잇기가 어려웠다. 보모의 이웃 동네에 살던 김씨는 처음으로 도움을 청했으나 거절당하자 울분을 참지 못한나머지 계모를 부엌칼로 살해 하고 자신도 자살을 기도했던 것이다.
1심에서 사형, 2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상고를 포기했다.
사형선고가 내리던날 부인 서씨는 혼인신고를 했다. 혹시나 변할지도 모릍 자신의 마음을졸라매기 위해서였다.
이소식을 들은 김씨는 면회온 아내에게 『아이는 고아원에 맡기든지 갖다 버리든지하고 개가하라』고 윽박지르고 그 뒤로는 찾아온 아내를 만나주지도않았다.
이때부터 무일푼인 서씨모녀의 외롭고 기약없는 옥바라지가 시각됐다.
대전·대구등 이감될때 마다 서씨모녀도 따라다녔다. 때로는 거적을 깔고 교도소앞에서 울며 밤을 새웠고 교도소에서 가까운 동네의 가정부·공원생활로 끼니를 이었지만 한달 한번썩 허용된 면회는 거르지 않았다.
아내의 자국한 정성애 김씨의 마음도,차차 돌아섰다. 흠뻑 비에 젖어 면회온 딸의 재롱을 보는 김씨의 눈에선 비로소 참회의 눈물도 보였다.
71년 김씨가 전주로 이감되면서 부부는 재생을 약속했다. 부인 서씨는 서울로 올라가 재산을 모으고 금씨는 모범 수로기술울 익히기로 약속한 것이다.
서씨는 행상을 시작했다. 광주리를 이고 과일·야채·생선·계란등 닥치는대로 팔았다. 다른 행상들이 하루 l∼2방주리를 팔때 서씨는 적어도 여섯광주리를 팔아야 직성이 풀렸다.
목이 아프고 손바닥이 갈라지고 발이 부르텄지만 매일남편에개 편지를 쓰며 아픔을 이겼다.
남펀도 매일 답장올 보냈다. 교도소에서 배운 실력으로 조판기술자가 됐고 l급 모범수가됐다.
2년여의 행상으로 서씨는 영등포시장 한구석에 조그만 모포상을 냈고 1년후 싯가 2천여만원의 아담한 집도 마련했다.
땅도 건강하게 자라 우등생으로 1∼2등을 다투고 있었다.
77년 영등포 교도소로 이감된 김씨는 80년3월 수감자로는 우리나라 처음으로 식자부문에서2급기능사자격을 땄다.
또 지난3월 대통령 취임식을 맞아 무기에서 징역2O년으로 감형됐고 출판사인 서울지기(대표 이신범)에 취업도 보장받았다.
『농고를 졸업하먼서 종장경영이 꿈이었어요. 농촌에서 가축을 기르며 속죄하렵니다. 아내가 그동안 고생이 녀무 많았으니 이젠 제가 고생할 차례지요.』
18년만의 햇빚이 눈부시드 김씨는 머리를 떨구었다.
『아빠 용기를 내세요. 저는학교에서 배웠어요. 상처받은 조개만이 진주를 잉태한다고….』 창살을 사이하고 18년을 보아온 아빠품에 처음안기는 고3딸은 어른스럽게 김씨 손을 잡아 엄마 서씨의 손에 얹어주었다.
너무도 오랜만에 남편을 맞는 서씨는 신부처럼 마음이 들떠있다.
남편식성은 모르지만 반찬거리 걱정도 즐겁기만하다.
18년을 하루같이 드려온 기도. 내년에 맞을 딸의 대학입학식에 부부가 함께 꽃다발을 들고 참석하는 꿈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권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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