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지지력 못받아 삼일천하에 그쳐|-태국의 군사쿠데타 거사부터 실패요인 많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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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산트」육군부사령관을 비롯한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소장장교」들의 태국 쿠데타기도는 계획단계부터 잘못돼 있었다.
군부의 제2인자 옹립-전군의 지지규합-국왕의거사후 재가라는 3가지 필요조건 중 이들이 갖춘 것은 2인자「산트」장군이라는 인물뿐이었다.
이「제2인자」가 내세운 거쟁의 대의명분마저 처음부터 의문에 싸인 것 이었다. 그는 쿠데타 직후부터 육군사령관직에 오르지 못해 불만을 가진 인물로 묘사됐다.
더구나 작전상의 잘못,「프렘」 수상과 국왕일가를「방콕」시내에 「확보」하지 못했던 잘못도 쿠데타가 3일천하로 끝나게 한 결정적인 원인이 됐다.「산트」장군의 「혁명위원회」가 1일 상오 의회를 해산하면서 각 군부대 지휘관들의 출두를「호소」하는 포고령을 내리는 동안 국왕일가와 함께「방콕」을 빠져나간「프렘」수상은 1백50㎞ 띨어진「코라트」육군기지에서 반전의 발판을 다지고 있었다.
숱한 쿠데타로 정권이 바뀌면서도 국왕은 태국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유지해온 인물. 헌법상 정치적인 권한도 가지지 않고 정쟁에 관여하지 않는 전통을 지켜온 국왕은 군·민에게는 국가의 상징이었다.
이 「부미볼」 국왕이 「프렘」 수상편에 섰다. 쿠데타에 가담하지 않은 군부대가 국왕편에 서게 된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해군·공군은 물론「프렘」 내각 각료의 반이상, 72개성의 성장40명도「코라트」의 국왕곁으로 달려왔다.
쿠데타군은 「프렘」 수상지지병력에 비해 『20배가 넘는다』고 호언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장악한것처럼 보였던 병력은 4개군관구중 「방콕」 주변의 1개군관구 병력뿐이었다.
숫적으로도 16만명의 육군벙력중 5만5천명. 이나마 전부가 호응하지 않았음이 진압후 밝혀졌다.
정부군은 유혈사태를 피하고자 쿠데타군의 와해전술을 폈다. 「부미볼」국왕도 이에 호응,마침 공주의 생일축하기간중 양측이 유혈사태를 일으키지 말라고 촉구해 반란군의 동의도 받아냈다.
이렇게 시간을 벌면서「프렘」수상은 반란군에대해 항복할것을 촉구하는 최후통첩을 3번씩이나 내보내며 사기를 떨어뜨렸다. 형세가 불리하게 된「산트」장군은 최후수단으로 대중의 인심을 얻기 위해 국회해산·신문검열등의 포고령을 거두어들였다. 대중집회에 나가 연설을 시도했다. 마침 예정되었던 연날리기대회를 이용, 지지를 호소하려 했으나 연설이 시작되려하자 그나마 3천여명밖에 되지 않던 군중이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이렇게 되자 반란군측은 정부군측과 협상을 시도했다. 우선 「크리앙사크」전 수상을 통해 국왕의 알현을 요청했다. 국왕은 알헌울 허락한다는 대답은 보냈으나 날자를 정해주지 않았다.「산트」장군은 또 2일밤 내내「프렘」수상측과 협상을 꾀했으나 항복만은 끝내 거부했다.
이렇게 되면서「산트」장군이 택할 길이란「항복·탈출·전투」 3가지밖에 남지 않게됐지만 휘하부대에 국왕의 정부군을 맞아 싸울 생각을 가진 병력은 없었다. 그는 결국 도망의 길을 택했다.
「프렘」수상의 정부군, 국왕의 근위대인 21연대가 「방콕」 진입을 위해 80㎞거리에서 행동을 개시한 3일 새벽5시쯤 시내 요소 요소에 배치했던 반란군병사와 「탱크」 들은 이미 슬금슬금 원대로 복귀하고 있었다. 정부군이 왕궁에 진주한 시간은 새벽6시30분인데 그동안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았다. 왕궁에 배치됐던 몇몇 반군이 영겁결에 위협사격을 가하다가 이내 항복 했다.
쿠데타의 시작은「전형」에서 벗어난 것이었지만 실패과정은 「전형」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항복하고 트럭에 실려 병영으로 되돌아가는 반란군들은 주눅이 들지는 않았고 그중 어느 병사는 『돌아갑시다. 힘을 아꼈다가 적군(「베트남」군)과 싸울때 써야지』 라고 소리쳤다
정부군과 반란군이 충둘할것 같던 2일 오후 직장을 나와 다투어 집으로 돌아가려는 시민들로 시내중심부가 한때 혼잡을 빚고 생필품을 사두려는 주부들로 상점들이 한때혼잡을 빚기도 했으나 생활의 리듬은 깨어지지 않았다. 집 밖으로 나오지 말라는 「프렘」수상의 경고가 있었으나 이날밤「방콕」의 유흥가인「팝통」가가 흥청대기는 여느 때나 마찬가지. 「마사지·살롱」앞을 지나는 행인에겐 『시끄러운건 밖이지 안에선 괜찮아요』 하는 소리가 묘한 느낌을 주기도 했다.
그렇지만 『다람쥐 쳇바퀴 돌듯』 되풀이 된 이번 정변극이 전혀 변화없이 끝난 것은 아니다. 거사때마다 명분이 돼오던「부패·경제난」등의 난제가 이를 계기로 쉽사리 해결되지는 않겠지만「프렘」수상도 국민에게 신선감을 주는 개혁안의 제시를 강요받게 될것으로 보인다. <김동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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