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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70)|<제73화>증권시장<제자=필자>(8)|증권구락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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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해방의 광명이 찾아왔으나 증권시장은 오히려 끝없는 암흑의 구렁텅이로 빠져 들어갔다.
1946년 1월 미군정령에 의해 조선증권이 해산된 이후 혼란을 거듭하는 정정 속에서 증권시장은 1년 이상을 공백상태로 지내야 했다.
혼란도 혼란이었지만 일제의 잔재로 오인 받기 쉬운 증시의 입장을 감안할 때 해방직후의 분위기로서는 섣불리 나설 처지도 못되었다.
그러다가 증시재건의 노력은 친목단체로부터 다시 출발했다. 취인소시절부터 증권업계에 관련을 맺어온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자주 모임을 가졌고 조선증권취인소 때에 상장되었던 주식들을 수집해 조금씩 매매하기 시작했다.
당시의 주도인물은 앞서 언급했던 조준호씨와 환대증권과 금익증권을 경영하던 송대순씨, 그리고 김광준씨(김광준 주식중매점 대표)와 김주묵씨(등본 「빌·브로커」사원) 등이 주축이 되어 증시재건에 기반을 다져나갔다.
그리하여 1947년 증권구락부라는 묘한 이름의 단체가 탄생하게 되었다. 증권을 아끼는 동호인들의 모임이라고나 할까.
서울 중구 남대문로2가 천대전「빌딩」(지금의 서울신탁은행본점 자리)의 지하실식당에서 창립총회가 열렸고 정관과 필요한 규약이 만들어졌다.
이사장에는 송대순씨가, 간사에는 김기영·김영기씨가 선출되었다. 창립당시의 회원은 모두 40명이었는데 그 밖의 주요인물은 기성도씨(명치증권임원), 황도성·이상규씨(산고증권사원), 이원희씨(동아증권사원)등 대부분이 8·15이전부터 증권계에서 낯익은 얼굴들이었고 그밖에 금융계 출신으로 김경진·한윤경씨와 그리고 김용주씨(현 전방회장)등이 적극적으로 참여했었다.
회원들은 수시로 모임을 갖고 수집된 일부증권으로 매매를 시도했으나, 도저히 증권시장이라고 하기에는 부끄러운 것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증권에 한번 맛을 들이면 여간해서 그 묘미를 떨쳐 버리지 못하는 것인가 보다.
일구월심 증시 재건을 강구하던 회원들은 이러다간 죽도 밥도 안 되겠다는데 의견이 모아져보다 적극적인 방책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우선 증권회사부터 설립하는데 총력을 경주하기로 했다.
이 같은 노력의 결실로 정부수립 이듬해인 l949년11월 대한증권주식회사가 설립되었고 이에 따라 증권구락부는 자연 해체되었다. 그러나 구락부회원 대부분이 대한증권의 주주가 되었고 일부는 임원으로서 직접 경영에 참여했다.
대한증권주식회사가 설립되기까지에도 수많은 난관이 가로막고 있었다.
처음 증권구락부가 주축이 되어 재무부측과 「로비」활동을 벌이자 기다리고 나 있었다는 듯이 사방에서 비난의 화살이 날아들었다.
행정부는 물론 국회·언론계까지 합세해 증권구락부를 망국 병에 걸린 집단으로 몰아붙였다.
도하 각 신문에서는 만약 정부가 이를 허가해준다면 이는 도박장으로 허가해주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라고 힐난했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어쩌면 당시의 재무장관이 김도연씨였다는 것이 증권계로서는 큰 다행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주무장관인 김씨만은 증권시장에 대한 이해가 달랐다. 일본과 미국에서 경제학을 전공했고 우리나라의 경제정책이 어디까지나 자본주의라는 점을 깊게 인식하고 있었다.
결국 재무장관의 결단으로 사면초가 속에서 증권시장은 다시 명맥을 잇게 되었다.
증권업 면허제1호로서 대한증권주식회사가 설립된 것이다.
한편 생각하면 당시 증권시장에 대한 각계의 비난은 당연한 일면도 있었다. 인천미두취인소가 생긴 이후 과당투기로 패가망신하는 사람들이 허다했던 까닭에 선입견이 결코 좋을 수 없었는데 일인 부자들의 이익을 비호했다는 비난을 면키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증권구락부는 비록 친목단체였을 망정 해방 후 혼란기를 용케 견뎌내게 해준 가교역할을 해준 공로가 컸다.
정관을 비롯해 규약·회원명부·회의록 등이 6·25동란 중에 불타버려 증권구락부에 대한 기록이 전무한 것이 안타깝다.
당시의 회원들마저도 지금은 모두 고인이 되어 현재 증권업계에 종사하는 이들조차 증권구락부의 존재가치를 충분히 모르는 것 같다.
또 대한증권주식회사를 설립할 때 당시 이범석 국무총리와 김도연 재무장관이 제1호 증권업결재 원안에 붓글씨로「사인」을 했다는데 그 결재원안을 지금 재무부에서도 찾을 수 없어 사료에 대한 보관이 얼마나 소홀했는가를 새삼 반성케 한다. <계속> 【이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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