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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 절벽' 겨우 벗어났는데 … "불씨 꺼트릴 혼란 그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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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1. “보면 알잖아요. 손님이 한 명이라도 있나요.”

 21일 오후 2시쯤 신세계백화점 본점 8층. 유명 아동복 매장인데도 매니저는 “요즘 장사가 어떠냐”는 질문에 싸늘하게 반응했다. 그럴 만도 했다. 주변 10여 개 아동복 매장에는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 그는 “중국·러시아 관광객 덕에 겨우 장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나마 상류층 소비는 조금 늘고 있다. 현대백화점은 서울 압구정 본점과 무역센터점을 중심으로 이달 들어 해외패션과 고급 가구의 매출이 20% 가까이 늘었다. 하지만 정지영 현대백화점 영업전략실장은 “추석 경기까지 좋아져야만 소비가 회복됐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2. “배가 없는데 무슨 수출입니까.”

 제주도 화훼 수출업체인 제이제이에프의 진광남 대표는 목소리를 높였다. 세월호 여파로 제주~인천 간 화물선 운항이 중단됐다. 뱃길이 막힌 것이다. 그는 “육지로 갈 화물이 부산으로 몰리고 있는데 제주~부산 화물선은 증편 없이 선박 안전 기준만 강화돼 적재량이 오히려 30% 이상 줄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상황이 제주산 밀감과 양배추가 본격 출하하는 10월까지 개선되지 않으면 물류 대란이 올 것”이라고 걱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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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가 세월호에 갇혔다. 물론 사고 직후 소비가 급격히 감소했던 ‘소비 절벽’ 상황은 벗어났다. 그러나 회복은 더디기만 하다. 이대로 두면 최경환 경제팀 출범 후 생긴 경기 회복의 기대감마저 날려 버릴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레저 업종은 5월과 6월의 황금연휴에도 불구하고 2분기(4~6월) 장사를 망쳤다. 2분기 각종 놀이공원에서 쓴 카드 결제액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121억원 줄었다. 골프장은 305억원 감소했다.

여름특수 기대도 바람이 빠졌다. 오비맥주 관계자는 “맥주는 즐거워야 잘 팔리는 파티용 술이기 때문에 무거운 사회 분위기가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말했다. 신제품 ‘에일스톤’을 내놓고도 시음 판촉 행사를 못했고, 올여름 월드컵 마케팅도 적극적으로 펼치지 못했다는 설명이다. 분위기도 안 좋은데 날씨마저 도와주질 않았다. 충남 만리포 해수욕장의 방문객은 지난해 55만여 명에서 올해 40만여 명으로 줄었다. 횟집을 하는 김모(67)씨는 “조용히 있다 가는 사람이 많아 매출은 지난해의 절반 정도”라고 말했다. 이마트의 올해 7~8월 물놀이용품 판매는 지난해보다 19.3% 줄었다. 롯데마트의 수영복 판매도 6월에 19.5%, 지난달에는 17.2% 감소했다.

롯데백화점의 지난달 매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5.5% 늘었다. 세월호 참사 전(5%)보다도 성장률이 오른 것은 처음이다. 역대 최고인 10억원 경품을 내세우고 여름 세일 한 달간 전력을 쏟아부은 덕분이다. 그러나 이달 들어 매출 증가율은 4.1%로 다시 떨어졌다.

 수학여행 전문여행사의 김종필(대한교육여행협회장) 사장은 “4~5월 예약이 다 취소되는 바람에 힘들었지만 정책 자금 지원을 받아 조금 숨통이 트였다”며 “하지만 가을철 단체 여행 피크까지 놓치면 정말 큰일 난다”고 말했다.

 서민 가계가 불황으로 받는 고통은 더 크다. 서울 신림동에서 CU편의점을 3년째 하고 있는 A씨는 “아무리 어려워도 여름장사를 망치는 법은 없었는데 올해는 6~8월 매출이 월 3000만원(예년은 4000만원)에 그쳤다”고 말했다. 최근엔 아르바이트생 인건비라도 아껴 볼 생각에 대학생 아들에게 야간에 가게를 보도록 하고 있다. 그는 “앞으로도 별로 좋아지지 않을 것 같아 걱정”이라고 말했다.

 전문가의 전망도 현장의 체감과 다르지 않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최근 경제 전문가 37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10명 중 7명이 소비가 세월호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는 시점을 연말 이후로 전망했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어렵게 지핀 회복의 불씨를 꺼트리지 않으려면 더 이상의 정쟁과 혼란은 없어야 한다”며 “시들해진 규제 개혁도 다시 가속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경제 상황은 녹록지 않다. 중소기업중앙회에 따르면 정상적으로 공장을 돌리고 있는 중소기업은 10곳 중 4곳(39.5%)뿐이다. 경제 심리도 갈수록 나빠져 중소기업의 8월 업황전망지수(81.6)는 2년 만의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재계에선 9·11테러(2001년) 이후 미국의 지도층이 보였던 ‘일상 복귀’ 메시지가 절실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당시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은 테러 발생 9일 만에 의회에서 “우리 모두 일상생활로 돌아가야 한다(go back to our lives)”고 강조했다. 줄리아니 당시 뉴욕시장은 뉴욕 관광 홍보 동영상을 틀었다. 송원근 전경련 경제본부장은 “내수 침체가 장기화하면 세월호에 이어 대한민국호가 침몰할 수 있다”며 “국민은 일상적인 경제활동으로 돌아가고, 정부와 국회·기업은 경제 활성화를 위해 뛰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영훈·구희령·채윤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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