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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35)제72화 비규격의 떠돌이 인생(33)|<제자=필자>김소운|경리부 직원과 충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소설『홍염』의 작자인 서해도내 트집에 골탕을 먹은 피해자의 하나다. 속으로는 일상 미안한 생각이 있으면서도 일본인(경성일보)과 한 편집국에서 그네들의 우월 의식을 조석으로 겪다보니 내 설익은 신경이 결과적으로는 언제나 내쪽 사람들을 괴롭히게 되어 버린다.
월급60원-그 60원으로 그들은 일곱 여덟 식구를 먹여 살려야한다. 그러나 나만은 단 두 식구-, 언제 사표를 내던져도 좋다는 그런 기분으로 일부러 철없는 체도 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 경일 패와 대충돌을 일으키는 사건이 생겼다.
총독부기관지인「매일신보」는 13도 방방곡곡에 의무구독으로 들어간다. 따라서 부수는「경성일보」를 몇 갑절 웃돌건만「경일」패들은 언제나 저들이「매신」을 먹여 살린다는 얼굴이다. 「경일」「매신」을 통틀어 경리는 하나인데, 기차「패스」(우대 승차권)니, 독자들에게 상으로 주는 은·동「메달」같은 것은 경리가 보관하게 되어있다.
「경일」의 식구는 사용으로 갈 때도「패스」를 쓰는데「매신」은 취재여행에도「패스」를 얻어내기에 공을 들여야 한다. 마감시간이 지나서도「경일」것이면 제자리에서 사진동판이 되어 나오면서, 시간 전에 보낸「매신」의 사진은 매양 더디 나와서 말썽을 부린다. 3단 지정이 어떤 때는 2단으로 나와서 다 짜놓은 판을 다시 고쳐야하는 그런 난처한 경우도 있다.
사진반의 책임자는「고오노」라는 일인이지만, 정작 그 일인보다도 제판부에 있는 내 동족친구가 한술 더 떠서 이 차별 대우에 재미를 붙인다.
「식민지 조선」의 축도 같은 이 편집국-그런데도「매신」쪽 대한 백성들은 이런 기풍에 도통을 한 것인지 거의 무표정이다.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든, 그것을 겉으로 나타내지 않는 것이 이 분들의 체념이요, 생활철학이다. 어린이 난에 뽑힌 작품에는 상으로 은·동「메달」을 보내기로 되어 있는데, 경리에서는「메달」이 다 나가고 없으니 좀 기다리라고 해서 여러 달을 보내지 못했다. 독자들에게서는 어떻게 된 셈이냐고 문의들이 잇달아 온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한 기회에「경일」의 독자에게는 그「메달」이 보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메달」뒷면에는「경일」과「매신」이 공통으로 쓰도록 두 사명이 나란히 부각되어 있다.
남은 수량이 적어졌기로니「매신」에는 없다던「메달」이 어째서「경일」독자에게는 보내지는거냐? 녀석들의 심사에 구역질이 나서「매신」입상자 20여명의 주소·성명을 적은 종이에다『이상 각 명에게「매신 학예부」명의로「메달」1개씩 즉송할 사』라고 적어서 사환을 시켜 경리로 보냈다.
사환이 돌아오자 뒤쫓아 경리부의 일본인 친구가 얼굴이 시뻘개서 들어오더니 내쪽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편집국장인 성해 앞으로 가서『이게 뭐냐?』고 위협하듯 소리를 지른다. 국장 아래 각 부의 부장이 있는게 상식이냐, 이 식민지 신문사는 좀 유별난 계층이 있어 이를테면「매신」의 국장은 사사요, 「경일」의 부장은 이사란 식으로 직제로는 국장이 일인부장보다도 되려 아래 계급이 된다.
『즉송할 사(세라레따시)가 뭐냐? 누가 누구에게 영을 내리는 거냐?』
하인에게 봉변을 당한 상전처럼 서슬이 시퍼런 그 경리씨 앞에서 온후한 성해 군자는 얼굴만 붉히면서 어쩔 줄을 모른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 친구가 서있는 곁으로 갔다.
『그건 내가 쓴 것이니 할 말이 있거든 내게 하려무나. 「세라레따시」면 어째서 안 된단 말이냐. 「네가이아게 다떼마쯔리 소오로오(원상봉후)라야 하냐?』
『이이까겐나 꼬또오 유우나!』(되잖은 소리 지껄이지 마!)
경리씨는 노발대발해서 잡아먹을 듯이 눈을 희번덕거린다.
두어 마디 오고가다가 어느 주먹이 먼저 나갔는지 다음 순간에는 둘이 한데 엉켜 편집국 마루 바닥을 뒹굴면서 한바탕 육탄전이 벌어졌다.
경리씨의 눈썹이 찢어져서 그 피로 내 옷이 시뻘개진 것도 그때는 미처 몰랐다. (넘어지면서 의자에 부딪친 것이 아닐까? 그런 전과를 내도록 내 주먹이 억셀리는 없다.)
육탄전의 1「라운드」가 끝난 뒤에 얼굴이 온통 피투성이가 된 경리씨는「경일」패가 데려가고, 나는 내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사정으로 한 노릇은 아니언마는, 마땅히 같은 분노를 느껴야할 내 동족들은 그런 격투를 눈앞에 보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람 하나 없었다.
마치 어려서 나룻배 안에서 본 그 광경-, 모시 두루마기의 청년이 일인 점원에게 봉욕을 당할 때 본체만체 외면을 하던 그 쓸개 빠진 동족이 여기 지금 내 눈앞에 있다.
흥분이 가라앉으면서 나는 허전한 외로움에 잠겼다. 그때 한쪽 얼굴을 붕대로 칭칭 감은 경리씨를 앞세우고「경일」패 10여명이 내 쪽으로 항진해 왔다.
의용대 지휘관은 경제부장인「이께다」-매일같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면서 제 부하를 힐책 매도하던 용사다.(이 친구의 욕지거리를 3년만 견디면 그 뒤는 무슨 과실이 있어도 일체 나무라지 않는다는 부설(?)이 있었다.)
『하나시다께와 쯔께로!』(결판을 지어야지.)
지전의 사발 깨지는 것 같은 목소리를 들으면서-가만 있자, 저 문자를 어디서 한번 들은 것 같은데-하고 기억을 더듬었다.
그렇다! 진재 직후 대만에서 이리떼처럼 몰려들던 차장패들이 하던 바로 그 소리다-. 겨우 2,, 3초 눈을 감고 그런 생각에 잠겨 있는 내 귀통에 경리씨의 주먹이 철썩하고 한 대 들어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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