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3)|제72화 비규격의 떠돌이 인생(31)<제자=필자>-나량 경찰서에 연행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제 입으로 시인이라고 자칭하는 의인을 이날까지 두 서넛은 보았지마는, 나 자신은 그런 비위를 일찌기 가져본 일이 없었다. 그러나 일생을 통해서 단 한번 이날 밤만은 예의였다.
『시인? 시인이면 연장(도구)은 어딨어?』
이게 또 무슨 개뼈다귀 같은 말씀인가? 성난 사자같이 위엄을 부리면서도 속마음으로는 그 형사 나으리 들의 우문이 우습기만 했다.
알고 보니 「연장」이란 벼루나 붓을 두고 한 말이다. 이 유식한 친구들은 시라면 한시- 그 한시에다 글씨 쓰는 서가를 결부시켰던 모양이다. 평생 처음으로 한번 뻐기어 본 「시인」이란 직함도 이쯤 되고 보니 속절없이 불발탄이 되고 말았다.
문 밖에도 자전거로 대기하는 형사가 둘이나 있었다. 앞뒤로 호위를 받으면서 한밤중의「미야꼬·오오지」를 걸어서 나량 경찰서까지 연행되어 갔다.
숙직하던 경부보(경위)와 몇 마디 문답이 오고간 나머지 강도 후보생의 혐의는 풀렸다. 숙직실에 걸려있는 몇 가지 신문철에는 내 책의 신간 평이 실려있었다.
『미안하게 됐소. 하지만 「우정강도」란 그런 「하이칼라」문자가 이런 시골에서 통하나요.』
나이 젊은 경부보는 웃으면서 자기 잠자리 곁에 나를 위해 담요를 깔아 주었다.
어느 천지에 소개장을 가진 강도가 있단 말인가! 「강도」란 두 글자에 새파랗게 질려 마주 보이는 파출소로 뛰어갔다는 그 사전부인에게 나는 화를 낼 기력도 없었다. 그러나 날이 밝아 경찰서를 나오자 알지 못해 사전약국에 전화를 걸어 『주인은 돌아왔느냐?』고 물어보았다.
전화에 나온 것은 부인이 아니고 집안 일을 돕는 「죠쮸우」같았다. 잠깐 기다리라면서 들어가더니 한참 후에야 대답이 들려왔다. 『돌아오긴 왔는데 머리가 아파서 누워있다』 는 것이다.
『아따마가 와루꾸떼-』(머리가 아파서)란 그 대답에 나는 실소를 했다. 「아프다」와 「나쁘다」가 일어에서는 공통으로 쓰인다. 『그런가요. 부인만이 아니고 주인 양반마저 머리가 나쁘시구먼요…. 그거 안됐습니다. 부디 조섭 잘 하시라구요….』
「죠쮸우」에게 비꼬아 준 내 말이 과연 통한 것인지 아닌지, 구보가 「대환영을 할거」 라던 그 사전씨와의 회견은 단념하고 그 길로 경도 쪽으로 걸어 해가 기울 무렵 해서 「이께」의 하숙집에 다다랐다.
서울 간다던 내가 이틀만에 되돌아 온 것을 보고도 「이께」는 별로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밤거리를 같이 거닐다가 자정이 가까와서 돌아 와, 좁은 삼첩 방에 깔린 「이께」의 잠자리 속에 같이 누웠다.
『일이 여의치 못했던가보지?』- 「이께」가 물었다. 그때까지 그런 말은 묻지도 않았고 ,내 입으로 하지도 않았다.
요 위에 엎드려 담배를 피워 물고는 대강 얘기를 했다.
대판서 만날 사람을 못 만났던 얘기-, 막차로 나량로 간 얘기-, 「우정강도」라고 쪽지에 쓴 얘기-, 「이께」는 그저 「흠」「흠」하고 듣고 만 있었다.
그러다가 형사가 들이닥치는 대문에서부터 대답소리가 없어졌다.
『그 경부보란 친구가 괴짜야, 기념이라면서 종이니 부채니를 내놓고 글씨를 써 달라잖 아…도리 없이 몇 장 쓰기는 썼지만-.』
여전히 「이께」는 대답이 없다. 잠이 들었나? 해서 「이께」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도수 강한 두꺼운 안경알에 가득 눈물이 괸채 「이께」는 짐승처럼 숨을 죽이고 움츠리고 있었다.
『바보 같으니…울긴….』
입으로는 그러면서도 내 가슴에는 통곡이 치받쳤다. 나보다 세살 아래인 이 친구를 그 순간 나는 죽음을 같이할 생애의 벗으로 마음에 새겼다.
「이께」가 책장을 훑어서 고책 가게에서 마련해 준 노자로 다음날 나는 서울로 떠나왔다.
「이께」와의 우의를 두고는 더 많은 얘기들이 있지만 지면을 아껴야겠다. (자세한 것은 일문수상 「은수삼십년」=1954년=속에 실려있다.) 「이께」는 동경제대 불문과를 마친 뒤 나와 한 때 자취생활을 한 적이 있었으나(뒤에 나올 얘기지만 나는 서울서 다시 동경으로 와 있었다) 얼마 후 열후결핵으로 요양원으로 갔고 나는 다시 동경 대삼 경찰서에서 3개월 넘어 장기체재를 해야했다.
연행된 것은 노구교사건으로 해서 중·일전이 불을 뿜기 시작한 1937년 7월이었다. (얼마전 중앙대 신문학과 교수를 정년 퇴직한 최준군이 그때 내 처소에 같이 있었던 죄로 3개 월 여를 취조한번 없이 내 옆방에서 곤경을 치렀다. 모진 놈 곁에 있다가 벼락을 맞은 셈이다.)
「이께」가 중태란 말을 듣고 형사와 동행해서 요양원으로 갔던 날, 「이께」는 머리맡에 있던 잡지 『신조』를 내게 주면서 쥐어짜듯 한 가느다란 목소리로 「구보·사까에」의 『화산회지』란 작품이 읽을 만 하더라고 했다. 나중에 그 「페이지」를 폈더니 어느새 꽂아 넣었는지 10원 지폐 두 장이 들어 있었다. 그 뒤 며칠이 못 가서 「이께」는 세상을 떠났다. <계속> 【김운소】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