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서예가 이기우씨 부인 임정옥 여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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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전각과 붓글씨로 자신만의 독특한 예술세계를 구축해온 철농 이기우씨(60). 40대 후반부터 신경성 질환으로 인해 육신이 약간 부자유하고 언어장애를 느끼는 그에게 부인 임정옥 여사(57)는 단순한 생의 반려 이상의 깊은 의미를 갖고 있다.
철농에게 아내는 그림자처럼 그와 함께 있으면서 충실히 생활을 돌봐주는 보호자이며, 가장 가까운 벗이며 또 그의 마음을 읽어 표현해주는 대변자이기도 하다.
크고 작은 고층「아파트」들이 빽빽히 들어차 있는 「아파트」촌 여의도. 그곳 12층 고층 「아파트」의 맨 위층에 철농은 살고 있다.
작은 응접실 한쪽 벽에는 『직농묵경처』, 쇠칼로 농사를 짓고 묵으로 밭을 가는 곳이란 뜻을 담아 그의 스승이었던 위창 오세창씨가 이름짓고 직접 써준 당호 액자가 걸려있다.
현관문을 열면 드러나는 거실은 큼직한 2개의 책상이 잇대어져 있고 두툼한 천이 덮여있는 작업실. 붓걸이에는 10여개의 크고 작은 붓들이 걸려있고 화선지가 널려있는 한옆에는 그윽한 고향을 풍기며 아직 젖은 채로의 붓이 벼루 위에 걸쳐있다.
『시아버님이 진명의 교장으로 계실때 제가 그 학교를 다녔으니까 남들은 제가 며느리로 뽑혔다고 했지만, 그게 아니예요. 시어른께서 저런 바보를 데려다놔야 10남매의 맏며느리 노릇을 하겠지 생각하신 것 같아요』하고 임여사는 얘기한다.
지난 72년 당시 78세로 작고한 시아버님 이세정씨는 한국 여성교육계의 개척자의 한 분으로 임 여사가 진명을 다니던 때의 교장선생님이었다. 따라서 임 여사는 당시 많은 동창생들의 화제에 오르내렸고 또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다.
『학교를 졸업한 후 정신대를 피해 철도국에 잠시 다니던 땐데 진명학교 3, 4학년 때 담임을 하셨던 문남식 선생(후에 숙명교장을 지냈다)이 통혼을 해오셨어요. 저 양반과의 첫 대면은 교장실에서였는데 당황해서 얼굴도 재대로 못봤어요.』
임 여사는 자신이 교장선생님의 며느리가 된 것은 남들이 얘기하듯 공부를 잘하고 얼굴이 예쁜 모범생이어서가 아니라 서울본바닥의 얌전한 가정에서 자란, 그러면서도 무던한 성격 때문이었던 듯 하다고 얘기한다.
첫선을 본 뒤「데이트」요청 한번 받아보지 못한 채(?) 약혼을 했고 다시 열흘 뒤에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을 한해는 42년으로 당시 임 여사는 19세, 철농은 23세로 징용을 피해 조선군사령부에 근무 중이었다. 전각과 붓글씨는 중학생 때부터 계속하고 있었다.
『젊은 시절 저 양반은 끔찍이도 약주를 잡수셔서 제 속을 많이 태웠어요. 가까운 사람들이 그 양반 약주 잡수시는데 붙들리면 꼼짝도 못하게 해 슬슬 피할 정도였어요.』
울어도 보고, 애원도 해보았지만 막무가내. 나중에는 월급날이면 철농의 퇴근길을 지키기도 했다고 임 여사는 회상한다.
『18년전 그때 경복중학 2학년이던 둘째가 서강에서 수영을 하다 익사했어요. 그때「쇼크」로 선경질환이 생겨 말과 몸이 자유롭지 못해지셨어요. 굳은 의지로 이제는 많이 좋아지셨어요.』
67년부터는 직장도 그만두고 술도 끊었다. 집념에 찬 투병 끝에 다시 붓을 잡은 후 요즈음은 전보다 더욱 창작에 열의를 보이고 있는 것이 임 여사는 눈물겹도록 기쁘고 감사하단다.
임 여사의 내조는 부군의 일상적인 시중으로부터 그의 문하생 돌보기, 대군을 대신한 사무처리 등으로 종일토록 이어진다.
때로는 철농이 자신이 쓴 여러 작품을 놓고 잘된 것을 골라보라고 청한다. 『저는 이 작품은 획이 어떻고 저것은 뜻이 어떻고 평을 하지요. 그러면 고개를 끄덕이세요.
서예가와 40년 가까이 살다보니 안목이 좀 생긴 모양이죠?』 임 여사는 밝게 웃는다.
철농은 72년까지 8회의 개인전을 가졌고 『철농인보』를 발간했다. 오는 가을에는 철농의 회갑을 맞아 그의 서집을 낼 계획으로 임 여사는 준비를 하고 있다. 슬하에는 장성하여 결혼한 주형(37)·재형(33)·재온(30)·규온(27) 2남2녀가 있다. <박금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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