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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잎에 당면 감추고 … 잡채, 한 송이 연꽃이 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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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푸드 포르노(식욕을 자극하는 음식 사진·영상), 패션 푸드. 모두 요즘 세대가 눈으로 음식을 즐기기 시작하면서 만들어 낸 용어다.

특징은 음식을 눈으로 보면서 오감을 더욱 확대시킨다는 데 있다. 음식의 색과 모양을 즐기면서 질감, 향, 씹을 때 내는 소리와 맛까지 상상할 수 있다는 ‘눈으로 먹는 음식’. ‘맛있는 월요일’이 아름다운 상차림으로 유명한 한식당과 일식당을 찾았다.

사찰음식 전문점 ‘고상’

‘고상’ 송수미 대표(左), ‘모국정서’ 정해강 셰프(右)

 서울 중구 수하동 미래에셋센터원 빌딩 지하에 있는 ‘고상’은 사찰음식 전문점이다. 불교에서 금기시하는 오신채(파·마늘·부추·달래·흥거)는 물론 육식 재료와 화학조미료를 일절 사용하지 않는다. “누구나 신뢰할 만한 건강한 자연식 밥상을 차리고 싶었다”는 게 송수미(45) 대표의 생각이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금속공예를 전공한 송 대표는 아들 준영(14)을 낳기 전까지 평범한 공예작가이자 주부였다. 그런 그가 ‘사찰음식’을 고민하게 된 건 아들이 아토피로 고생하게 되면서다. “먹는 게 중요하다는 한의사의 말에 이전에는 관심 없던 음식 세계에 눈을 돌리게 됐다”고 했다. 한의학자들을 찾아 아들에게 좋은 ‘건강식’을 공부하면서 철마다 자연이 선물하는 싱싱한 식재료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그 정점에 사찰음식이 있다는 걸 알았죠. 아이의 병이 신기하게도 낫는 걸 보면서 다른 누군가도 이런 건강한 밥상을 찾고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음식 솜씨가 좋았던 외할머니에게 길들여진 미각과 한의학을 공부하며 알아낸 음식궁합만 믿고 덜컥 식당을 차린 게 지금의 고상이다. “채식주의자가 많은 외국인들에게 한국의 아름다운 문화를 선보이는 데 사찰음식만 한 게 없다”는 믿음도 있었다. 그리고 송 대표에겐 또 다른 아이디어가 있었다. ‘눈으로 먹는 아름다운 밥상’에 대한 계획이다.

 “밥투정이 심한 아들의 식사시간을 즐겁게 할 목적으로 ‘재밌고 예쁜 상차림’을 만들게 됐어요. 생선을 접시에 그냥 올려놓으면 아들은 본체만체했죠. 그런데 생선의 흰 살을 발라 동그랗게 뭉친 다음 쪄서 그 위에 알록달록한 채소를 입혀 접시에 올리면 재밌어하며 맛있게 먹더라고요. 눈이 즐거운 식사가 중요한 걸 알았죠.”

 금속공예를 사사했던 은사의 ‘사물을 있는 그대로만 보지 마라’는 말씀도 떠올랐다. 제철 식재료가 가진 맛은 살리면서도 보는 이가 호기심을 가질 만한 ‘푸드 스타일링’ 아이디어가 마구 떠올랐다.

 물론 어려움도 많았다. 요리를 전공하지 않은 송 대표가 머릿속 그림만으로 식재료의 장점까지 살리는 데는 그만큼의 시행착오가 따랐다. 한국의 아름다움을 잘 살린 보자기 문화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연잎잡채를 만들 때는 손님이 연잎을 푸는 순간 그윽한 연잎 향과 대지의 느낌을 닮은 우엉의 따뜻한 향기가 한 번에 터져 나올 수 있도록 초·분 단위까지 계산하면서 레시피를 연구했다.

 “처음엔 ‘요리도 모르고 비주얼만 좇는다’고 삐딱하게 보던 주방 식구들도 이젠 내가 어떤 새로운 아이디어를 생각했는지 먼저 물어보죠.”

일본식 선술집 ‘모국정서’

왼쪽 큐알 코드를 스마트폰으로 찍으면 상차림이 아름다운 ‘고상’과 ‘모국정서’의 다양한 음식 동영상을 감상할수 있습니다. 동영상은 joongang.co.kr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있는 ‘모국정서’는 4인용 테이블 3개와 10명 정도 앉을 수 있는 ㄱ자 바가 들어선 작은 이자카야(일본식 선술집)다. 3월에 정해강(40) 셰프와 일본인 아내 이시이 마스미가 문을 열었다.

 10년 전 일본 정보기술(IT) 업계에서 근무하던 정 셰프는 나이 들어서도 계속할 수 있는 직업이 뭘까 고민하다 요리에 입문했다. 일본의 유명 요리학교 쓰지에서 공부하고 도쿄 긴자에 있는 미슐랭 1스타 식당 무쓰카리(MUTSUKARI) 주방에서 수련한 뒤 지난해 귀국했다.

 ‘일본 선술집’으로 풀이되는 이자카야는 술을 마시며 간단한 안주를 먹는 집이다. 일본에서 요리보다 술에 먼저 관심을 가졌다는 정 셰프는 일본 술 소믈리에 ‘기키자케시’ 자격증도 있을 만큼 술을 사랑한다.

 그렇다고 모국정서의 안주가 ‘간단한’ 건 아니다. 슈토(젓갈류, 짭짤한 술안주), 감자 사라다(으깬 감자샐러드), 남방즈케(광어튀김을 남방소스에 재운 것), 부타가쿠니(일본식 돼지간장조림) 등 이름은 간단해 보여도 일단 주문한 접시를 받아 드는 순간 손님의 눈과 입은 쩍 벌어진다. 쉽게 볼 수 없는 아트 접시와 요리의 어울림이 고운 채색 비단에 올린 보석을 봤을 때처럼 아름답기 때문이다.

 “작은 이자카야를 운영하면서 접시 차림은 미슐랭 스타 식당을 따라가고 있으니 순전히 제 욕심인 거죠. ”(웃음)

 일본에선 고급 식당일수록 그릇 장이 크다. 일본 요리의 정수라 불리는 ‘가이세키 요리’ 전문점은 유명할수록 식당 크기만 한 그릇 창고가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계절·식재료에 따라 요리를 담아내는 그릇을 달리하는 일본 문화의 특징 때문이다.

 모국정서의 음식이 그렇다. 평범한 회 한 점을 올리더라도 생선살의 색감과 질감이 어울리는 접시에 담아낸다. 으깬 감자샐러드처럼 부드러운 질감의 음식을 낼 때는 폭포가 연상되는 접시에 담아 감성의 균형을 이룬다. 정 셰프가 식당 개업을 준비하면서 가장 신경 쓴 부분도 그릇이다. 경기도 이천·광주 도자기 전문점들을 돌아다니며 맘에 드는 그릇을 찾아냈다. 때로는 작가들의 가마를 직접 방문해 자신이 원하는 그릇을 주문했다. 평범해 보이는 모국정서의 앞 접시 하나가 10만원이 넘는 건 정 세프의 이런 욕심 때문이다.

 “일본 사람들은 식당에서 돈을 지불했다면 그건 단순히 음식을 먹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식당만의 최적화된 문화를 보고, 듣고, 느끼고, 맛보기 위한 대가라고 생각하죠. 모국정서를 찾아오는 손님들에게도 그런 공감각적인 즐거움을 느끼게 하고 싶습니다.”

서정민 기자
사진=최승식, 이영환 인턴기자

그릇과 음식도 궁합이 있다

뜨거운 음식은 찰흙으로 만든 투박한 질감의 도기가 좋다. 온기를 잘보존하는 데다 생선구이·스테이크처럼 무게감 있는 요리들과도 잘 어울린다. 회나 샐러드 같은 차가운 음식은 매끄러운 질감의 자기가 좋다. 냉장고에 넣어 차갑게 식혔을 때의 청량한 느낌과도 어울린다.

사진설명

‘모국정서’의 감자를 으깨어 만든 샐러드. 구운 고구마 칩, 육포, 이탈리안 파슬리 등으로 장식했다. 폭포 아래에서 한 송이 꽃이 피어난 느낌이다.

10가지 제철 채소를 잘라 젤라틴으로 싸서 굳힌 일본식 테린. 플라스틱처럼 색색이 어울린 채소가 너무 예뻐 쉽게 젓가락을 대기 어렵다.

구절판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5색 연잎연꽃잡채 고명. ‘고상’에선 취향에 맞게 원하는 채소만 골라 섞을 수 있도록 면은 연잎에 싸서 찌고(작은 사진), 고명은 연꽃에 올려 따로 낸다.

인삼 뿌리를 휘어서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를 표현했다. 유자청은 구름, 콩떡갈비는 열매, 아스파라거스는 초록색 들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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