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의원회관에도 ‘명당’이 따로 있다. 바로 접근성과 조망권을 모두 갖춘 방이다. 의원회관은 ㅂ자 형태의 지하 5층, 지상 10층 건물이어서 바깥 전망이 좋은 7~8층이 ‘로열층’이다. 그중에서도 국회의사당 앞 푸른 잔디와 분수대가 보이는 방과 한강·양화대교가 내려다보이는 북서쪽에 위치한 방들이 인기가 많다.
이런 로열층은 대체로 다선(多選) 의원들의 몫이다. 각 당 원내 행정국이 의원들로부터 희망하는 방을 접수하는데 관례적으로 선수(選數)와 연령 순으로 배정하기 때문이다. 고참 우대론이다. 3선 이상 의원들의 방 분포도를 보면 새누리당 35명 중 16명(46%)이, 새정치민주연합 42명 중 19명(45%)이 7~8층에 둥지를 틀었다. 반면 전망이 별로 안 좋은 3~4층엔 초·재선 의원들이 포진해 있다. 3층 의원실 25개, 4층 의원실 37개 중 3선 이상은 5명뿐이다.
의원회관을 리모델링한 뒤에는 9층도 새로 떠오르는 ‘핫플레이스’다. 엘리베이터를 홀수층과 짝수층으로 나눠 운행하는데 9층 버튼은 짝수층 엘리베이터에도 있기 때문에 접근성이 좋다.
◆방 번호에 숨은 뜻=방 번호가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경우도 있다. 새정치연합 안철수 전 공동대표는 5·18 광주민주항쟁을 상징하는 518호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형인 이상득 전 국회부의장은 초선 때부터 6선 때까지 4·19 혁명에서 따온 419호를 썼다고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 대통령 비서실장을 했던 문재인 의원의 325호는 노 전 대통령의 서거일(5월 23일)을 뒤집은 번호다.
박지원 의원은 615호를 고수한다.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을 의미하는 숫자로 박 의원이 대통령 비서실장 시절 남북 첫 정상회담을 성사시킨 주역이기 때문이다.
반면 재선 의원인 새누리당 김용태 의원은 의미 있는 숫자도 아니고 전망이 좋지도 않은 338호를 18대 국회에 이어 또 쓰고 있다. 방 번호가 바뀌면 지역구인 서울 양천을 주민들이 의원실을 찾아오기 불편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김 의원실 측은 “이 방이 원래 비교섭단체 몫으로 배정된 데다 전화번호도 바뀔 뻔했는데 국회 사무처랑 2주 넘게 싸워 초선 때 쓰던 방을 그대로 지켜냈다”며 “좀 더 좋은 방이 아니라 오히려 기피하는 방을 달라고 조른 건 우리가 유일할 것”이라고 말했다.
◆444호는 불운·괴담의 진원지=의원들이 기피하는 방 번호도 있다. 대표적인 게 444호다. 15대 때 이 방을 썼던 민주당 국창근 전 의원이 공천 결과에 반발해 불출마와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그 뒤에 이 방을 차지한 16대 김낙기 의원, 17대 정종복 의원은 모두 다음 총선에서 낙선했다. 18대 때는 전북 정읍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된 유성엽 의원이 이 방을 썼다. 유 의원이 재선에 성공하면서 444호도 징크스를 깨는 듯했다. 하지만 19대 국회 들어 의원회관을 리모델링하면서 아예 ‘444’란 방 번호를 없앴다.
428호와 643호도 의원들의 정치생명을 단축시킨다는 괴담이 따라다닌다. 17대 국회 때 428호를 썼던 한화갑 당시 민주당 대표가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상실했다.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김홍업 전 의원이 이 방을 물려받았는데 김 전 의원도 18대 공천 탈락 후 무소속으로 출마했다가 낙선하자 불운이 이어지는 것 아니냐는 풍문이 생겨났다. 하지만 지금은 새정치연합 안규백 의원이 탈없이 잘 쓰고 있다.
643호는 16대 때 박주선 의원이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고 17대 때 열린우리당 이철우 의원, 18대 때 친박연대 홍장표 의원 모두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상실했다. 다만 박 의원은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고 18, 19대에서 배지를 달았다. 지금은 새정치연합 전정희 의원이 쓰고 있는데 전 의원도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됐다가 항소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대통령을 배출한 방=역대 대통령을 배출한 방들은 누가 주인일까. 박근혜 대통령을 배출한 620호는 새누리당 비례대표 이운룡 의원이 쓰고 있다. 당시 비례대표이던 박 대통령이 대선 출마를 선언하면서 이 의원이 의원직을 승계했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이 17, 18대 때 썼던 545호는 새누리당 이완영 의원이 입주해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사용했던 312호는 새누리당 나성린 의원이, 노무현 전 대통령이 쓰던 638호는 새정치연합 임수경 의원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328호는 새누리당 강석호 의원이 각각 차지하고 있다.
김경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