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건」의 인권외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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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카터」대통령의 인권외교는 요란했던 구호에 비해 실적은 보잘것이 없는 것이었고, 어떤 경우에는 심각한 역효과까지 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레이건」행정부가 인권문제에 관한 정책을 일관성 있고 일률적으로 추구하겠다고 밝힌「에드윈·미즈」(「레이건」보좌관)의 발언은「카터」행정부의 인권정책의 실패에 대한 반생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카터」의 인권정책이 비판을 받는 것은 대개는 두 가지 관점에서였다. 하나는 미국이 소련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동구공산제국과 중공·북괴·「쿠바」에서 일어나는 인권탄압에는 눈을 감고 우방국가의 인권문제에 집중적인 간섭을 시도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인권문제를, 현실을 무시하고 신축성 없이 추구하여 각종 현안문제의 해결에 적지 않은 지장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전자의 가장 적절한 예가 한국이다. 「카터」의 대통령취임이 박동선 사건과 때를 같이하여 77년 78년 사이에 의회에서는 연일 한국의 인권에 관한 청문회가 열리고 국무성에서는 잇달아 성명과 논평이 나왔다.
그때 북괴의 인권문제는 완전한 치외법권 적인 특권을 누리기라도 하는 것 같이 청문회 하나 없이 넘어갔다.「캄보디아」에서 최소한 2백만 이상의 양민이 학살되는 사태가 일어났을 때도 그것은 미국의 대외정책에는 반영되지 않았다. 동구·중공·「쿠바」의 인권문제도 같은 우대를 받았다.
신축성 없는 인권외교의 전형은 소련과「이란」에서 찾을 수 있다. 「카터」행정부는 유대계 소련인들의「이스라엘」이민 허용, 반체제 지식인들에 대한 탄압중지 등을 요구하여 소련내의 인권은 개선되지 않은 채 미 소 쌍무 관계가 큰 대가를 치렀다.
「이란」에서는 한편으로는「팔레비」지지를 다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팔레비」로 하여금 반정부「이슬람」세력에 대해 돌이킬 수 없는 양보를 강요하여 결과적으로 친미적인 「팔레비」왕조의 붕괴와「페르시아」만의 혼란을 자초한 것이다.
「에드윈·미즈」가 밝힌「레이건」행정부의 의도는 인권의 적용 대상국이나 적용 방법을 미국의 국가이익에 맞도록 현실화한다는 뜻으로 해석이 된다. 특히 인권정책상의 목표달성을 위해서 공개적인 제재보다는「조용한 외교」쪽을 택할 것이라는「미즈」암시는 환영할 만 한 것이다.
소련에 대한「카터」행정부의 인권압력은 미국 내 유대계 유권자들을 의식한 전시용이라는 일면이 있었기 때문에 내용보다는 소리가 컸었다.
「이란」에서도「팔레비」지지의 인상을 상실할 정도의 압력을 노렸기 때문에「팔레비」의 체면이 손상 당하는 방법일 수밖에 없었다.
조용한 인권외교라는 것은 표면에 나타나지 않는 설득을 함으로써 상대국 지도자가「압력하의 양보」라는 인상을 남기지 않고 위신의 손상없이 대화를 통해서 현안의 인권문제를 해결하도록 하겠다는 뜻이다.
인권을 상표로 하는 외교는 득 보다는 실이 많기 마련이다. 전통적인 국제법은 주권국가가 자기 국민을 다루는데 있어서의 자유재량권을 인정하고, 그래서「유엔」헌장의 인권조항도 일부러「인권보호」대신「인권신장」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다만 특정국의 인권탄압이, 「인류의 양심」이 용납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면 단독 또는 집단으로 인도적인 간섭을 하는 관례가 생겼다.
1827년「오토만」제국치하의「그리스」민족을 위해 영·불·로의 3국 간섭이 근대적인 인권간섭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간섭의 정당성 여부는 언제나 간섭하는 쪽이 일방적으로 결정되기 때문에 쌍방에 마찰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레이건」행정부가 인권문제의 이런 특수성과「카터」행정부의 전례를 거울삼아 인권정책의 방법과 대상국을 현실적으로 재조정한다면 한미관계에서도 불협화음이 없어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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