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순도순 「달동네」에 때아닌 「빙초산 송사」|세든 부부 연탄가스 중독 되자 주인이 빙초산으로 치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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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신음중인 연탄 「가스」 중독 환자에게 빙초산을 잘못 썼다가 생명은 구했으나 화상을 입게되자 「생명의 은인」과 「중독 환자」 사이에 송사가 벌어졌다.
서울 노량진본동 130의 76 최성학씨 (68)와 최씨 집 뒷방에 세든 고형돌씨 (25)가 송사의 당사자들.
「가스」에 중독 됐던 고씨는 『생명을 구해준 것까지는 좋으나 독성이 강한 빙초산을 잘못 사용해 화상을 입혔으니 배상하라』고 요구하는 한편, 고소를 당한 주인 최씨는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 주니 보따리 내놓으라고 하는 격』이라며 펄쩍 뛰고 있다.
이들의 송사가 비롯된 것은 지난달 27일 새벽 0시30분쯤.
최씨 집 뒷방에 세든 고씨 부부는 잠을 자던 중 방바닥에서 새어나온 연탄「가스」에 중독 돼 의식을 잃은 채 신음하며 몸부림쳤다.
이때 벽 하나를 사이에 둔 안방에서 막 잠이 들려던 최씨 부부는 심상치 않은 낌새를 알아차리고 황급히 달려가 문을 열어보았다.
고씨 부부가 연탄 「가스」에 중독 돼 중태에 빠진 것을 발견한 최씨의 부인 김씨는 부엌찬장에 있던 빙초산이 들어 있는 병을 들고 뛰어왔다.
김씨는 먼저 고씨의 부인 박상순씨 (23)의 코에 병 주둥이를 들이 됐다.
5분쯤 지나자 박씨는 손·발을 뒤척이며 의식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김씨는 다시 고씨의 코에 병을 들이 됐다. 그러나 고씨는 부인만큼 빨리 의식을 찾지 못했다. 김씨는 당황한 나머지 병을 더욱 바짝 들이대려다가 그만 빙초산을 엎지르고 말았다.
빙초산은 의식을 잃은 고씨의 입을 통해 목구멍으로 흘러 들어갔으며 양쪽 뺨과 목 부분으로 흘러내렸다.
새벽 1시쯤 최씨 가족들은 어느 정도 의식을 되찾은 고씨 부부를 들쳐업고 1㎞쯤 떨어진 병원으로 달려갔다. 고씨 부부는 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상오 8시쯤에는 퇴원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고씨는 흘러내린 빙초산 때문에 입안과 목구멍에 염증이 생기고 얼굴에 화상을 입어 이를 치료하기 위해 다시 병원에 입원했다.
고씨는 병원에서 「부식성 식도염과 구내염」으로 11일 동안 치료를 받았으며 입원비와 치료비로 40만원이 들었다.
채소 행상으로 하루 5천∼8천원을 벌어 근근히 살아가는 고씨에게 40만원이란 무척 큰 부담이었다.
고씨는 생각 끝에 누이 형자씨 (30)를 통해 집주인 최씨에게 이를 부담해 줄 것을 요구했다.
고씨의 요구를 전해들은 최씨는 기가 막혔다. 『생명을 구해주었으면 됐지, 치료비까지 부담하라니 무슨 소리냐』며 발끈했다.
「택시」 운전사인 장남의 수입 (월 평균 15만원 정도)에만 5식구가 매달려 살아가는 최씨 집안 형편으로서도 치료비 부담은 매우 어려웠다.
어쨌든 치료비 부담 요구로 최씨와 형자씨는 욕설과 삿대질까지 섞어가며 큰 말다툼을 벌였다.
이같은 감정 대립 때문에 급기야는 고씨가 최씨의 부인을 걸어 경찰에 고소하고 민사 소송까지 제기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 팽팽한 줄다리기싸움을 놓고 이제는 동네 주민들까지 나서 시비를 가리는 논쟁이 한참이다.
이들은 지난 7월 고씨가 세 들어온 후 이번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서로 큰소리 한번 내는 일없는 정다운 이웃이었다.
이같은 시비와 말다툼으로 오순도순 지내오던 한 지붕 밑 이웃사촌이 이제는 서로 원수처럼 여기는 어이없는 결과를 빚은 셈이다.
최씨 집은 고씨 부부 외에도 3가구가 더 세 들어 살며 재개발 지역에 묶여 내년 봄에는 모두 철거될 「달동네」. 이 사건만 아니었으면 두고두고 잊지 못 할 사이가 너무 크게 벌어졌다.
이를 지켜 본 이웃 주민들은 『잘잘못을 가리기에 앞서 서로를 조금씩이나마 이해해주면 곧 정다운 이웃으로 되돌아 올 수 있을 것』이라며 『언제부터 세태가 이토록 각박해 졌는지 모르겠다』고 안타까와 했다. <허남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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