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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안개정국」걷히면서「정당공수」밀려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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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80년대의 문을 연 지난1년간은 사건과 사건, 긴장과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이에 따라 기자들은 「뉴스」의 현장을 쫓느라 영 일이 없었고 「데스크」들은 폭주하는 기사처리에 시간가는 줄 몰랐다. 「뉴스·데스크」에 비친 「80년」은 실로 기록되어야 할 주옥같은 역사물로 가득 찼으나 여러 형편과 능력의 한계로 미진한 것이 너무 많은 것을 통감한다. 「데스크」수첩에 아롱진 것들을 모아 한해를 조감해 보는「시리즈」를 송년특집 물로 마련했다. <편집자 주>
올해는 신당 설로 시작해서 다당 시대로 막을 내리게 됐다.
연초에 신당 설이 나돌더니 반짝한 3김 시기, 「5·17」사태, 전두환 대통령의 부상, 정당홍수로 이어져 결국 정당얘기에서 시작해 정당얘기로 1년을 보낸다.
연초의 신당 설은 그 진원을 캐기가 힘들어 쾌나 애를 먹었다.
그런 가운데 김종필 당시 공화당총재가 1월7일 당시무식에서 『제3당이 아니라 4당, 5당이 나와도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당원들을 다독거려 우리로서는 더욱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사실 신당 설에 가장 과민한 것은 대권을 바라본 3김이었고 그 중에서도 김종필씨였다. 신당이란 결국 정부 쪽이거나 친여 세력일 테니까 김씨가 겉으로는 대범하게 말하지만 속으론 걱정이 많았으리라고 여겨졌다.
과거 공화당 4인 체제였던 K씨가 추진한다는 얘기가 나와 그가 근무하는 회사건물에 취재 망을 치기도 했고 4인 체제와 관계가 있는 S「그룹」에서 돈은 댄다는 설이 그럴듯하게 퍼져 재벌 쪽을 파 나갔다. 그러나 모두가 허사. 심지어 신 총리가 순 개인적 친분으로 신문사 간부와 만난 것을 두고도 신당 설과 연관시켜 보도되기까지 했다.

<한때 신 총리 관련 설도>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풍설만 무성했고 뿌리를 찾을 수 없어 「도깨비」같다는 걸로 결론짓고 말았다.
한때는 정부 개헌심의에서 나온 이원 집 정부 론과 관련지어 최대통령과 신당을 결부시키는 해석이 나왔으나 「5·17」로 해서 모든 것은 낭설로 입증됐다.
「안개정국」으로 불리긴 했지만 「5·17」이전까지는 김종필 공화당총재·김영삼 신민당총재와 김대중이 정립한 3김 시기였다.
3김간의 경쟁 속에서 피해를 본 것은 언론이다. 세 사람의 기사크기·사진·「가십」에 차이가 생기면 당장 신문사에 전화가 걸려 온다. 특히 극성스런 쪽에서는 조금 불리하다 싶은 기사가 실리면 그날 저녁 출입기자 집에 틀림없이 협박전화를 걸었다.
「데스크」의 신경은 자연 지면배정, 사진의 크기, 사진에 이목구비가 제대로 찍혀 나 왔는 지에까지 신경을 써야만 했다. 그러다 보니까 세 사람 기사의 비중이 자연 커졌고 일부에서는 3김을 언론이 키우는 게 아니냐 해서 합의를 제기하기도 했다.
김종필·김영삼씨는 지방을 누비며 마치 대통령 선거 전을 방불케 했고 다른 김은 대학을 빌어 대중강연을 하고 있으니 무시할 도리가 없다. 더구나 3김은 저마다 집권을 장담하고 나셨다. 이것을 유심히 지켜본 사람 중에서는 3김의 과열경쟁이 사회혼란을 유발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이도 있었고 과열이 학원소요와 광주사태 등의 도화선이 됐다고 지적하는 사람도 있었다. 신문에서 「안개정국」을 거론해도 이들은 자신 만 만이다.
중앙일보는「안개정국」이란 제목으로 3월19일부터 29일까지 9회에 걸친 「시리즈」를 냈다.
김종필씨가 전주연설에서 『이곳은 내 외가가 살던 곳이니까 전라도는 외가고 경상도는 처가동네』라고 하는가 하면 김영삼씨는 진주연설에서『내 아내가 진주여고를 다닌 적이 있다』고 말해 연고지 경쟁까지 벌였다. 틀림없는 선거양상이다.
그러나 김종필씨의 마음 한구석에는 불안이 있는 것으로 「데스크」는 읽었다.
김씨는 마산에 들러 식사도중 식당 여주인이 손수건을 꺼내 무엇이든 써 달라고 하니까 고려말 이방원의 하여가를 본뜬 즉흥시를 지어 주었다.
『오호라 그래서 그랬구나. 그러니 어찌하리, 그렇고 그런 세상 그럭저럭 살아가리』-.
옆에 있던 박종규씨가 『김 총재의 심경을 나타낸 것』이라고 주석을 달지 않았더라도 착잡한 심정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이때가 1월29일. 김씨는 또 『인간은 바람 따라 돌고 도는 팔랑개비와 같다』고도 했다.
이 무렵 정부와 공화당, 공화당과 유정회 간의 관계가 삐걱거리고 있었다.
김씨는 그의 재산처리문제에서 다소 고심하는 듯 했다.
어느 날 김씨가 언론기관 정치부장들과 저녁식사를 같이한 자리에서 재산처리문제에 대한 얘기가 오갔다. 같이 참석했던 신형식 공화당 사무총장이 『일부에서는 기왕 내놓을 바에야 제주도 감귤 밭은 제주대학에 주고 서산 삼화 목장은 어느 농과대학에 기증해 실습 장으로 쓰도록 하는 게 좋겠다는 얘기를 한다』고 남의 말처럼 해서 건의하자 김씨는 『왜 말들이 많은지 모르겠다』며 다소 언짢은 표정이었는데 며칠 후 결국 제주「감귤」농장이 속해 있던 운정 장학회(운정은 김씨 아호)에 삼화 목장을 출연하는 방식을 취했다.

<「해바라기」유행어 풍미>
정치부의 「비상」은 이후락씨의 해외나들이 때에도 걸렸다.
태국「방콕」에서 열린 불교관계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이씨가 불교신도회 회장자격으로 지난해 12월10일 감쪽같이 출국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사람들이 한번 놀랐고 해외체재 예정기간 1개월이 넘어서도 소식이 없 자「망명」이 아닌가 하는 얘기가 나왔다. 「파리」에 갔을 것이라는 설, 그전에 한번 체재한 것으로 알려진 중남미「카리브」해의 「바하마」섬 같은데 갔을지 모른다는 추측이 나돌았다.
그러던 중 2월초 미국에 머물고 있는 것이 밝혀졌고, 이씨 말로는 틀니 제작관계로 치과에 다니고 있다고 했다. 이씨가 출국할 수 없게 되어 있는데 정승화 전 계엄사령관이 허가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이씨 귀국이 쉽지 않을 것으로 추측들을 하고 있었다. 신문사로서는 망명을 하더라도 큰「뉴스」거리고, 어느 날 돌아온다고 하면 놓치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수시로 미국과 김포공항을 「체크」했다.
그러던 중 3월14일 이씨가 홀연히 김포공항에 내렸다.
유명한 「떡고물」얘기는 이때 이씨가 그의 집을 찾아간 기자들에게 털어놓은 것이다.
『정치자금을 만지다 보니 이런 말 저런 말 다 들었지만 떡고물 안 흘리고 떡을 먹을 수 있느냐.』-여기서 말한 「떡고물」의 비율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으나「약간」의 부스러기가 있었다는「뉘앙스」로 신문에서 받아들였다.
공화당의 정풍 파동이 이씨만을 겨냥한 것은 아니지만 이씨의 귀국으로 해서 불이 훨훨 붙었다.
3월25일 공화당 당무회의가 이씨의 제명을 결의하자, 이씨는 이날 하오 2명의「보디·가드」와 함께 공화당기자실에 나타나 『당내책임은 모두 김 총재가 져야 한다』는 폭탄선언을 하고 유유히 김총재 방문을 거쳐 나갔다. 딴사람보다 잘 살았으니 재산의 일부를 사회에 환원시키겠다고 도 했다.
이것을 지켜본「데스크」는 무언가 커다란 일이 벌어지지 않나 하는 예감이 들었다. 평양에 가서 김일성과도 단판을 짓고 나와 남북대화를 추진한 장본인인데 김 총재에게 역습을 할 때야 무언가 내다보는 데가 있든지, 믿는 데가 있을 것이라고 짐작되었다.
정풍 와중에서 유행어가 되 다시 피한 「해바라기」정치인에 대해 다 쓰지 못한 대목이 있다. 소장의원들이 해바라기성 정치인은 물러가야 한다고 하니까 일부에서『×묻은 개가 ×묻은 개를 흉본다』는 격이라고 꼬집었다. 사실 최초의 정풍 파 의원들 중 상당수가 청와대의 어느 실력자를 찾아다녔다.
「해바라기」라고 한 것은 고 육영수여사가 불의의 사고를 당했을 때 자기 집에 빈소까지 차려 놓고 큰소리로 곡했다는 K모씨가 정작 박정희 대통령서거 땐 나타나지도 않았다는 소문에서 K씨를 가리킨 것으로 이해되었지만 실력자 방에 들랑날랑한 사람들도 마찬가지가 아니냐는 얘기였다.

<깜깜했던 개각정보>
5월은 어수선한 달. 최규하 대통령이 석유외교로 5월11일 중동방문 길에 나선후 대학생「데모」가 더욱 격렬해 졌다. 개헌논의에서 절충형 정부형태가 꼬리를 물었고 학생들은 정부 쪽을 공격하면서「데모」했다.
이에 앞서 「데스크」는 고위소식통으로부터 학생「데모」대를 수습하는 방안이 서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정부는 치안문제에 자신을 갖고 있었다.
이 고위소식통은 개헌논의가 중구난방 식인데 대해 못마땅해했다. 이른바 「3김」에 대해서도 대체로 불만을 표시했다. 그래서 머지않아 질서개편작업이 있지 않나 하는 막연한 생각을 갖게 됐다. 정치상황이 어떻게 변화되겠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 정치부 「데스크」는 70%정도 변화가능성을 점칠 수 있었다.
신 총리가 담화를 내 정치일정을 앞당긴다고 했으나 그 정도로는 효과가 날 상황이 아니었다. 급기야 중동에서 귀로에 있던 최대통령이 일정을 하루 앞당겨 16일 저녁 급거 귀국했다.
무언가 급박하다는 생각이 「데스크」를 긴장시켰다. 17일은 토요일. 이날 대학생대표들이 이화여대에 모여 「마라톤」으로 대책회의를 하다가 경찰로부터 해산을 당했다. 「5·17」은 여러 예감이 적중한 조치였고 이후 정치는 장기 동면에 들어갔다.
정치의 뒤안길을 거니는「중앙탑」도 지난해 「10·26」후처럼 다시 휴 재에 들어갔다.
5월13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가 발족되고 권력형 축재자의 재산환수, 여-야 의원들의 사퇴사태가 잇따라 생기면서 정당 담당기자들의 일이 다시 시작됐다.
7월의 뜨거운 염천아래서 싸늘한 대규모 공무원 숙 정이 단행됐다. 개혁주도세력에 의한 굵직굵직한 조치가 불시에 터지곤 했다. 내일엔 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데스크」는 늘 생각해야 했다.
그 중에서도 8월 달의 최규하 대통령하야성명은「쇼크」였다.
며칠 전부터 「중대발표」가 있을 것이란 얘기가 있었지만 정확하게 안 것은 발표 하루 이틀 전.
「중대발표 설」은 이밖에도 여러 번 나돌았고 그럴 때마다 「데스크」는 기자들의 「정보」를 종합하기에 바빴다.
개각은 정치부의 중요 취재「메뉴」. 전대통령이 9월1일 취임하고 박충훈 내각이 4개월만에 물러나게 되었다.
그 뒤를 「하와이」대학에 가 있던 남덕우 전부총리가 승계 하리 란 소문에 따라 남씨가 귀국한 8월29일 기자들이 김포공항을 지켰다. 남씨는 기자들을 따돌리고 「어떤」사람들과 총총히 사라졌다. 그 뒤로는 서울 서교동 남씨 집을 계속 지켰다.
공항에서 혹시 다른 곳에 갔을지 모른다는 소문 때문에 한때는 총리 되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의 현상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나오기도 했으나 남 전 부총리 집에 당시국보위소속이었던 김재익 경제기획원기획국장(현 청와대경제수석비서관)이 들어가 한나절동안이나 같이 있는 것을 보고 총리입각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집에서는 남 전 부총리가「부재중」이라며 대문을 열어 주지 않아 취재기자는 문밖에서 취재 차 속에 앉아 동정만 살필 수밖에 없었다.
어느 때의 개각취재보다 힘이 몇 배 들었다. 종전에는 개각발표전날에 80%가량 맞혔으나 이 경우에는 50%에도 미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개각기사에 오보가 많았다.

<오랜만에 열린 기자실>
「10·22」개헌안 국민투표부터 정치부의 일손이 바빠졌다.
제헌국회 때의 기록에는 약간 미치지 못하나 95·5% 투표율에 91·6%찬성률은 예상보다 훨씬 앞선 것이었다. 투표마감시간(7시)를 넘어서 한때 투표율이 97%선이란 얘기가 나돌았으나 시·도 집계결과는 96%에 미치지 못했다.
새 헌법 안 공포에 이어 국가보위입법회의가 생기면서 여의도의사당 기자실의 먼지가 털렸다. 입법회의가 여의도의사당을 회의장소로 택함에 따라 「5·17」후 근6개월만에 기자출입이 허용된 것. 직통전화를 울려 본 기자, 『남북직통전화가 개통되는 느낌』이라고 입을 열었다. 정치풍토 쇄신 법은 입법회의의 첫 작품이다.
이 법에 따라 소위「구 정치인」중 8백35명이「규제 자」로 공 표되었고 그중 2백68명이 적격판정을 받는 동안「데스크」에는 누구누구가 풀리느냐는 전화가 쇄도했다. 부모의 부음정도가 아니면 딴 생각을 못할 만큼 바삐 돌아갈 때 걸려 오는 전화「벨」소리는 정말 짜증스럽다. 그러나 정치인들의「생명」을 좌우한 규제와 적격 판정에서 나타난 그들의 초조에는 인간적인 동정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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