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교황청 굴뚝에 앉은 희망의 갈매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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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잊혀지지 않을 기억이다. 지난해 3월 13일 저녁 나는 바티칸의 성베드로 광장에 있었다. 그 자리를 지킨 몇 안 되는 한국인 중 하나였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할 무렵 시스티나 예배당 굴뚝 위에 새 한 마리가 날아와 앉았다. 굴뚝을 크게 보여 주던 광장의 대형 스크린을 보니 새하얀 갈매기였다. 광장에 모여 굴뚝만 바라보던 사람들이 술렁였다. 상서로운 징조로 여기는 분위기였다.

 15분 이상 가만히 앉아 있던 갈매기가 사라진 직후 굴뚝에서 흰 연기가 피어올랐다. 새 교황이 선출됐다는 신호였다. 전날 저녁과 이날 오전에 한 차례씩 검은 연기가 솟구쳐 나온 뒤의 일이었다.

 광장에는 2000명 정도밖에 없었다. 이틀 만에 콘클라베(교황 선출을 위한 추기경단 회의)가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이 널리 퍼져 있고 비까지 내리던 때였다.

 30분 뒤쯤 성 베드로 광장에 수직으로 맞닿은 대로가 형형색색의 우산으로 뒤덮였다. 새 교황을 보려고 몰려나온 바티칸과 로마의 시민들은 인산인해의 장관을 연출했다.

 다시 30분 뒤쯤 광장 북쪽 중앙의 성 베드로 대성당 2층 발코니에 새 교황이 등장했다. 장루이 토랑 추기경이 “하베무스 파팜(교황이 나셨다)”을 선언하자 새 교황이 수줍은 듯한 모습으로 발코니 앞쪽으로 다가와 입을 열었다. “보나 세라!” 교황의 첫 인사는 ‘굿이브닝’이었다. 너무나도 소박한, 그러나 긴 여운이 남는 한마디였다.

 고백하자면 그보다 3일 전에 쓴 콘클라베 예상 기사에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 추기경(프란치스코 교황)은 언급조차 안 했다. 종교 전문가들의 견해를 토대로 안젤로 스콜라(이탈리아)·오질루 셰레르(브라질) 추기경이 유력한 후보라고 썼다.

 새 교황은 다음 날 콘클라베를 위해 묵었던 호텔에 가 자신의 카드로 비용을 지불하며 몸소 체크아웃을 했다. ‘낮은 데로 임하는’ 이례적 행보의 신호탄이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해 8월 가톨릭 잡지 ‘치빌타 카톨리카’의 편집장인 안토니오 스파다로 신부와의 대담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교회를 전투가 끝난 후의 야전병원으로 봅니다. 중상을 입은 사람에게 콜레스테롤이 있는지 혈당의 수치가 높은지 물어보는 일은 쓸데없는 일이지요. 먼저 환자의 상처를 치료해야 합니다.”

 상처투성이의 사람들이 많은 이 땅에 오늘 교황이 온다. 야전병원 사령관을 자임한 그가 치유의 희망을 가득 몰고 오기를 바라 본다. 갈매기의 새말은 ‘희망’이다.

  이상언 중앙SUNDAY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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