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86) 경기 80년-제71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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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44년 12월 어느 날, 추운 겨울날씨에도 불구하고 김포비행장으로 근로동원을 나갔던 5학년생들은 작은 사건을 하나 일으켰다. 학생들이 일본인교사 하나를 집단으로 구타한 것이다.
문제의 교사는 평소부터 쓸데없는 우월감으로 학생들의 비위를 거슬려오던 사람이었는데 이날 작업중 학생 하나를 작업을 태만히 한다는 이유로 심하게 구타했던 것이다.
화가 난 학생들은 분을 참지 못하고 있다가 밤중에 인솔교사 숙소로 찾아가 그를 불러내, 멋모르고 나온 그에게 집중 투석을 가해 심한 부상을 입히고 말았다. 부상을 한 그는 도망치듯 그 자리를 피해 서울로 올라와 버렸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학교측으로부터는 아무런 조치가 없었다. 당시 학교에서는 그 사건을 저지를 주동 학생도 알아낼 수 없을 뿐 아니라, 문제를 더 이상 확대시켜봐야 아무 이득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으리라.
이 사건을 과격한 교련과 무리한 근로동원으로 그때까지 쌓이고 쌍인 학생들의 불만이 하나의 돌파구를 찾은 것이었으나, 이런 유의 사건은 이것이 처음이 아니었다.
어떤 학생은 궁성요배 때 웃었다는 이유로 퇴학을 당했고, 어떤 학생은 일본 국가를 부를 때 입만 움직이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가 발각돼 퇴학을 당했다.
또 어떤 학생은 역사시험 답안에 한일합방의 부당성을 역설하다가 졸업을 얼마 앞두고 퇴학을 당하기도 했다.
당시는 학생들의 사상통제를 위해 학교에서 전 학생에게 「정진일기」를 의무적으로 쓰도록 했는데, 간혹 어떤 학생은 분을 참지 못하고 일제를 모욕하는 내용의 글을 써내 처벌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40년말, 당시 5학년생이 중심이 된 소위 「고려회 사건」이란 것이 일어났는데, 이 회는 항일독립운동을 위한 학생단체로서 국외로의 탈출을 꾀하다가 발각, 10여명의 학생이 함께 검거된 큰 사건이었다.
그런데 이 가운데는 평소「학업이 우수하고 품행이 방정한」학생들이 많이 끼어있어 학교로서도 크게 놀랐다. 그래서 학교측은 고려회가 내걸었던 요구사항은 사실무근의 것임을 학생들에게 누누이 강조했으나, 그럴수록 학생들은 학교측의 말을 믿기는커녕 문제학생들의 참된 애국심의 용기에 감탄했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뒤로는 간혹 독서회사건이 자주 일어나 관련학생들이 희생되곤 했는데, 이러던 중 44년 4월 소위 「소요가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44년 봄 학생 중 하나가 「경기중학교 소요가」라는 장장 14절에 달하는 노래를 만들고 몇몇 학생들이 그 내용을 등사, 어느 날 점심시간에 전교생을 강당에 몰아넣고 가사를 배포하고 이 노래를 지도하다가 발각됐던 것이다.
이 사건에서 「소요가」의 작사자인 홍승면(41회·언론인)이 무기정학을 당했는데 소요가의 가사는 비록 일본어로 돼있었지만 『계림에서 태어나 천부의 사명을 짊어진…』등의 민족적 색채가 강한 것이 주 내용이었다.
45년에는 큰 사건이 두 가지 있었는데 그 하나가 「단파사건」으로, 과학시간 중 통신기기에 흥미가 있던 학생들이 단파수신기를 직접 조립, 이를 통해서 미국방송을 듣고 전세가 일본에 불리하다는 등의 내용을 학생들 사이에 비밀리에 퍼뜨리다가 몇몇 학생이 종로서에 가서 엄중한 문초를 받은 것이다.
다른 하나는 「병기고 사건」으로, 일본의 패망이 시간문제라는 것을 안 일부 학생들은 무장봉기를 통해 그 시간을 단축하겠다는 생각으로 학교 병기고에서 소총과 실탄을 훔쳐내다가 발각돼 그 주동자들이 일본군 헌병대에 체포됐던 것이다. 이들은 체포된 뒤 문초를 받을 때 『훔친 총기를 무장봉기에 쓰려했다』고 떳떳이 진술해서 의연한 태도를 보였다. 45년 8월 15일 드디어 해방은 왔다. 일본의 연합국에 대한 무조건항복이 있던 날, 나라 전체는 해방의 기쁨과 감격에 뒤덮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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