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왕호 선원들 회견내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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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남북경위는.
▲해왕6, 7호는 지난1월26일 백령도서북방 공해상에서 고기를 잡다 북괴경비정의 습격을 받아 무차별 사격을 당해 6호가 먼저 잡히고 7호도 선장 김환용씨가 순직하면서 잡혀 끌려갔다.
-불법 침입시인, 전향 등을 강요당했는가.
▲포박 당한채 해군기지 같은 곳에서 하룻밤 지내고 남포로 끌려가 10일 동안 집단 수용됐다. 그곳에서 개별적으로 불러 신문했는데 해왕호가 해상 분계선 북쪽29·5「마일」까지 침범했다고 우겼다.
그후 사리원과 해주에서 외부와 차단된 수용생활을 계속했다. 매일아침8시부터 밤 10시까지 상오에는 「김일성 혁명사상과 주체사상」「조국통일10대 정강」「김정일의 덕성」에 관한 학습을 강요당했고 하오에는 북괴찬양노래와 선전영화를 관람했다. 그 사이에도 개별적으로 끌려가 신문을 받았으며 「남한에 가면 죽게 된다」「공화국이 통일되면 가족들은 금방 만나게 된다」는 등의 말을 하며 전향을 강요했다. 하루 중 밤10시 이후 30분 정도밖에 자유시간을 주지 않았다.
-어떻게 회유하려 했는가.
▲아픈 곳이 없느냐면서 병원엘 끌고 가긴 했으나 치료도 제대로 해주지 않고 「김일성 수령님 덕택이니 은혜에 보답하라」고 했고 협동농장·유치원·공장 등을 보여주면서 그동안 대우를 잘해주고는 김일성의 배려라고 했다. 돌아와서는 감상문을 쓰라고 했다.
노동당대회 때는 평양의 김일성 광장·모란봉 경기장을 끌고 다니면서 구경시켰다. 온통 붉은색 투성이에 사람들이 기계처럼 움직이는걸 보고 소름이 끼쳤다.
-먼저 납치돼 역류중인 우리 어부를 만난 일은.
▲없다.
-귀환전 기자회견을 했다는데.
▲나(서동남·24)는 그때 북괴찬양노래 합창제의를 했다. 기자회견은 각본을 그대로 옮긴 강제 행사였다.
우리들에게 회견장에서 입은 양복까지도 새로 맞춰 주었다가 회견이 끝나자 벗겨갔다. 11월초부터 말투·몸짓까지 1주일이상을 준비했다. 다시 돌아가겠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연극을 하면서 처량하다는 생각에 눈물이 나왔다.
-송환사실은 언제 알았나.
▲피납 직후에는 3∼4개월 후 송환하겠다고 했으나 10개월이 지나도 소식이 없어 절망했다. 그런데 11월초 기자회견을 준비시키면서 『곧 가게될테니 기자회견을 잘하라』고 해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았다.
지루하게 기다리다 절망한 몇명이 투신, 할복자살을 기도했지만 실패하고 자아비판을 강요당했다.
-김정일에 대한 북한주민의 반응은.
▲김일성의 후계자가 된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듯 무관심했다.
-새 정부에 대한 북괴의 태도는.
▲그들은 매일 방송을 통해 우리 정부와는 대화를 할 수 없고 우리 정부를 쓰러뜨려야 남북통일이 된다고 했다. 남한은 미·일의 식민지가 된 것이나 마찬가지고 무슨 방법으로든 통일시켜 김일성의 은혜 속에 살게 해야한다고 했다.
우리들에게 인도적 입장에서 돌려보내는 것이니 북에서 교양받은 대로 친척·친구들에게 선전하라고 했다.
-최근의 북한실상은.
▲남한에는 껌팔이·구두닦이·지게꾼·막노동꾼·실업자만 우글거리는 것으로 선전하고 있었다. 평양 등에 관광을 갔을 때였는데 길에는 자동차나 사람이 거의 안보였고 뒷골목에서 주민들이 정렬한채 구령에 맞춰 곡괭이와 삽으로 땅을 파는 것을 봤다. 군대집단 같은 사회로 보였다.
공장·유치원을 보러 갔을때 만난 주민들은 무표정하고 지쳐있었으며 몸이 여위고 얼굴에 윤기가 없었으며 머리모양과 복장이 획일적이었다.
-돌아온 소감은.
▲이번 기회에 김일성 하나를 위해 모든 사람이 존재하고 바깥을 모르는 바보가 돼버린 북한주민의 실상을 볼수 있었다. 입으로는 통일을 말하면서도 때로는 「까짓거 한번 해치우고 말지」「양코배기만 나가면 그냥 썅」하는 등 우리가 바라는 남북대화와는 먼 도발적 생각을 하고 있더란 것을 국민들에게 전해드리고 싶다.
정부와 국민에게 심려를 끼쳐 죄송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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