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취재 일기

장관에게 '예산 청탁'하는 정권 실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9면

장세정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유정복 인천시장(왼쪽)이 8일 시청사에서 정종섭 안전행정부 장관을 만나고 있다. [사진 인천시]
장세정
사회부문 기자

7·30 재·보선에서 최대 승자는 단연 이정현 새누리당 의원이다. 철옹성 같던 호남 지역에 여당 후보로서 18년 만에 처음 깃발을 꽂았다. 6·4 지방선거에서 가장 짜릿한 역전승을 거둔 광역 단체장은 유정복 인천시장이다. 여당의 승산이 낮아 보였던 곳에 도전해 재선이 유력해 보이던 경쟁자를 꺾었다.

 이 의원과 유 시장의 공통점은 더 있다. 박근혜 대통령과 개인적 인연이 깊다. 이 의원은 최근까지 청와대 홍보수석을 지낸 측근이다. 유 시장은 박 대통령의 야당 시절 비서실장을 5년이나 했다. 두 사람은 정권 탄생에 기여한 공신이자 실세로 분류된다.

 또 다른 공통점은 선거 당시 ‘집권 여당의 힘 있는 후보로서 지역에 많은 예산을 끌어오겠다’고 공약한 점이다. 이 의원은 ‘예산 폭탄’이란 말까지 동원했다.

  두 사람은 혈전 끝에 국회의원과 시장이 됐다. 축하파티가 끝나면서 유권자에게 진 빚을 갚아야 할 처지가 됐다.

 아니나 다를까. 유 시장이 먼저 움직였다. 8일 인천을 방문한 정종섭 안전행정부 장관을 시청사에서 만났다. 유 시장은 지방교부세(35조원)를 관장하는 정 장관에게 대놓고 ‘예산 청탁’을 했다. 인천시의 하루 채무이자만 11억원이 넘을 만큼 부채비율이 높다 보니 다급했을 성싶다. 유 시장은 ▶보통교부세 증액 ▶실·국 조직을 11개에서 14개로 확대 ▶인천소방본부 1, 2본부장 신설 등의 요구를 쏟아냈다. 정 장관은 “지원이 필요한 현안에 대해 협의를 진행하겠다”고 에둘러 답변했다고 한다. 안행부는 자세한 언급을 피했지만 인천시는 “유 시장의 건의 사항을 정 장관이 긍정적으로 검토하기로 했다”고 상세한 보도자료를 냈다.

 조만간 이 의원 차례가 될 것 같다. 자신을 뽑아준 순천·곡성에 예산 폭탄을 날리지 않으면 공약(空約)을 남발한 못 믿을 정치인이 된다. 자칫 공약이 부메랑이 될 상황이다.

 이 대목에서 차분히 따져볼 게 있다. 퍼주기식 포퓰리즘이 만연하면서 중앙이든 지방이든 요즘 예산이 없어 아우성인 데가 한두 곳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권의 실세들이 “우리 지역에 예산을 더 달라”고 실력행사를 한다면 어떻게 될까. 결국 힘없는 다른 지역의 예산을 줄이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말하자면 ‘아랫돌 빼서 윗돌 괴는 꼴’이 될 수 있다.

 유 시장은 안행부 장관을 지낸 3선 의원 출신이다. 재선인 이 의원은 지역구를 넘어 전체 국민의 대표다. 두 사람은 누구보다 솔선해 법을 지켜야 할 공인들이다. 서울대 법대 교수이자 헌법학자 출신인 정 장관도 시험대에 올랐다. 권력 실세 앞에서도 법과 원칙을 지키고 제대로 중심을 잡는지 국민은 지켜볼 것이다.

장세정 사회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