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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음파진단 영상 스마트폰에 띄웠다 … '닥터'가 찾은 묘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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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류정원 힐세리온 대표가 자신이 개발한 휴대용 초음파 진단기기(왼쪽)와 스마트폰을 들고 있다. 이 기기는 3G· LTE·와이파이 통신을 통해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에 영상을 전송하고, 다른 의료진과 영상을 공유해 원격진료를 할 수 있다. 김상선 기자

2011년 가을, 만삭의 산모 환자가 서울 외곽에 있는 한 병원의 응급실로 실려왔다. 환자가 숨을 쉬지 못하는 긴박한 상황이라 산부인과도 없는 2차 병원에 온 것이다. 설상가상 부부는 의사소통이 어려운 지체장애인이라 환자의 상태를 알기도 어려웠다. 당시 응급실에서 근무하던 류정원(41) 힐세리온(Healcerion) 대표는 심폐소생술로 숨을 쉬게 만든 후 인근 대학병원으로 환자를 이송하기 위해 응급차에 올라탔다. 위급 상황에 대비해 약물을 움켜쥔 손이 덜덜 떨렸다. 집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만삭의 부인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는 “인생에서 가장 긴 10분이었다”고 회상했다.

 “나중에 들으니 산모와 아기 모두 사망했더군요. 지금도 응급실에 초음파기기만 있었어도 산모와 아기 둘 중 하나는 살릴 수 있었을 거라는 아쉬움이 듭니다.”

 서울 구로동 서울시창업지원센터에 입주한 힐세리온 연구실에서 류 대표를 만났다. 그는 인사가 끝나기 바쁘게 손바닥 한 뼘 안팎인 20㎝짜리 기계를 꺼내 보였다. 의사 가운 주머니에 들어갈 정도로 작은 크기에 무게 360g의 초음파 진단기기다. 배터리로 충전하는 무선 제품이다. 다른 한 손으로는 스마트폰을 꺼내 특정 애플리케이션(앱)을 실행시켰다. 진단기기 끝을 사람 배에 문지르니 스마트폰에 초음파 영상이 나타난다. 진단기기에서 초음파 신호를 수신해 디지털 신호로 처리하고, 이를 스마트폰에 전송하는 방식이다. 무선인데다 와이파이·3G·LTE 통신에 접속하며 스마트폰 운영체제인 iOS·안드로이드와 연동되는 초음파 진단기기는 힐세리온이 세계 최초다.

 “앱의 영상 공유 기능을 활용하면 전 세계 어디에서든 원격 진료가 가능합니다. 덕분에 구급차 같은 응급 현장, 아프리카 오지에서도 손쉽게 사용할 수 있지요. 가격 경쟁력도 충분합니다. 소비자 가격이 대당 6000달러(약 620만원) 수준으로, 무선 송신 기능이 없는 경쟁사 제품보다 30% 이상 저렴합니다.”

 의료기기에 정보기술(IT)을 더하는 ‘융합적 사고’는 그의 특이한 이력에서 나왔다. 우주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류 대표의 얼굴을 알아볼지도 모르겠다. 그는 2006년 4월 한국 우주인 후보 공모에 도전, 최종 10인에 선발돼 언론의 주목을 받은바 있다. 당시 벤처기업의 기술총괄이사로 소개됐지만 그는 가천의학전문대학원에 재학중인 의대생이기도 했다. 벤처업계에 잔뼈가 굵은 전자공학도이자, 예비 우주인 출신의 의사인 셈이다.

 류 대표는 군대를 제대한 뒤 늦은 나이에 1997년 서울대에 입학, 물리학과 전기공학을 복수 전공했다. 당시 IT 벤처 붐이 일던 사회 분위기에 편승해 벤처기업을 노크했다. 대학 시절 3년간 8개 회사에서 엔지니어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졸업 후인 2001년 ‘디지젠’이라는 디지털 영상저장장치 개발업체를 창업했다. 그러나 ‘닷컴 버블’의 막차를 탄 터라 회사는 자금난에 시달렸고 류 대표는 다른 창업자들과 결별해 회사를 나왔다.

 그 후 오디오·비디오 신호처리 기술 회사인 ‘아이티매직’에서 최고기술책임자(CTO)를 맡아 일했다. 음성인식 등의 생체신호 처리 기술을 만들다 보니 실제 인체 안에서 어떻게 신호가 전달되는지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과학에서도 미지의 영역으로 남은 인간의 뇌와 신경세포를 연구하면 평소 관심을 가져온 인공지능(AI) 분야에 대한 해답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가 2005년 가천의학전문대학원 1기에 ‘무작정’ 입학한 이유이기도 하다.

 다음해 우주인에 도전한 것도 비슷한 사연에서다. 우주가 아직 풀리지 않은 미지의 세계인만큼 탐구·개발할 여지가 많은 영역이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품어온 우주에 대한 동경도 큰 몫을 했다. 체력 테스트를 통과하기 위해 모래주머니를 차고 4㎞를 달린 후 수영 연습을 했다. 매일 2시간 독한 운동 끝에 13㎏을 감량했다. 스스로도 “목표를 정하면 반드시 해내야 직성이 풀리는, 아주 집요한 성격”이라고 말할 정도다. 그런 그가 우주인 선발에 탈락했다고 꿈을 포기할 리 없다. 미항공우주국(나사·NASA)의 항공우주의학 부문에 합류할 길을 백방으로 찾았지만 미국 시민권이 없어 제약이 많았다. 아쉬운 대로 나사와 텍사스대와 함께 의대 졸업생을 대상으로 만든 여름 프로그램인 ‘항공우주의학 입문’과정에 한국인 최초로 참여했다.

 2012년 2월 설립한 힐세리온의 시작은 쉽지 않았다. 휴대용 초음파 진단기기에 관한 아이디어를 들고 의료기기 업체를 찾자 관계자들은 고개를 내저었다. 불편해도 큰 기계를 사용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는 게 그들의 설명이었다. 그 말에 오히려 오기가 생겼다. 류 대표는 “기존 업체는 도전하지 않을 것 같으니, 내가 반드시 해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컴퓨터를 스마트폰 크기로 줄이려고 하면 불가능해 보이지만, 핸드폰에 컴퓨터 기능을 얹는 식으로 ‘발상의 전환’을 하면 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의지가 강한 만큼 넘어야 할 산도 높았다. 초음파 기기에서 음파를 쏘고 돌려받는 센서가 아날로그 부분인데 이 아날로그 신호는 회로가 클수록 처리가 쉬워 소형으로 설계가 어려웠다. 초음파는 잡음을 걸러내는 기술도 중요한데 소형 기기는 손에서 발생하는 생체 전기, 배터리에서 발생하는 열로 노이즈가 더 많다. 힐세리온은 이런 단점을 기술력으로 극복했다. 류 대표가 벤처업계에서 근무하면서 축적한 디지털 신호처리 기술, 기존 의료기기 업체에서 생소했던 회로설계 기술을 더해 약 1년 만에 시제품을 완성했다. 스마트폰 화면을 디스플레이로 활용하고 정보처리 기능을 스마트폰 앱에 분담해 기기를 작게 만들었다. 16명의 직원 중 절반을 차지하는 8명의 개발 인력이 설계를 거듭해 개선하고 모의 실험을 반복한 끝에 거둔 결실이다.

 힐세리온은 소프트뱅크벤처스·엠벤처·마젤란투자기술·길병원에서 20억원의 투자를 받아 개발 비용을 댔다. 투자자들은 “국내에서 보기 드문 기술 중심형 벤처”라고 투자 이유를 설명한다. 올해 안에 한국을 포함해 미국·유럽·캐나다·말레이시아 등에서 제품 인증과 판매를 시작할 계획이다. 인증이 나는 대로 세계 각국에 총 900대(약 30억원)를 판매하기로 샘플 계약을 체결한 상태다. 내년 목표는 전 세계에 5000대를 팔아 해마다 매출 200억원을 올리는 것이다. 류 대표는 “기존 헬스케어 시장은 미국처럼 기초과학 수준이 높고 자본도 많은 나라가 선도했지만, 모바일 헬스케어라면 정보통신 기술이 발달한 한국이 오히려 성장 가능성이 높다”고 강조했다.

 “시제품을 ‘국경 없는 의사회’ 관계자에게 보여줬더니 ‘꼭 인증 받고 우리한테 판매해 달라’고 부탁하더군요. 회사가 수익을 내기 시작하면 산모 사망률이 높은 아프리카 국가에 제품을 기부할 생각입니다.”

글=박미소 기자
사진=김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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