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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른 삶 느린 생각] 우리가 정치에 바라는 건 현실 문제의 현실적 해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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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7호 28면

일러스트 강일구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지도 이제 100일이 넘었지만, 지금까지도 거기에서 시작한 참담한 느낌과 분노는 끝나지 않고 있다. 원인은 물론 대책이 충분히 마련되지 않고 있다는 데 있다. 다른 한편으로, 더 넓게 보면, 사건이 준 충격은 사건 자체의 비극적 규모로 인한 것이지만, 그것이 참담한 느낌을 준 다른 이유는 많은 사람에게 사회 전체에 들어 있는 깊은 병을 문득 깨닫게 했기 때문이다. 참으로 사건의 원인이 사회의 병에 있다면, 치료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는 없을 것이다.

큰 감정의 정치학

그렇다고 문제를 지나치게 근본적인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은 현실적인 조처를 지연하는 일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일단 이러한 관점에서 일을 조금 에둘러 생각해보기로 한다. 사건의 요인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선박 운영의 고리마다에 끼어든 부패다. 그러나 현장에서 그것은 일처리에서의 성실성 부족으로 나타난다. 작은 것이면서도 이것이야말로 사회에 퍼져 있는 병의 큰 증후이고 결과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국정 위한 심성 훈련 설명한 『성학십도』
에두른다는 것은 오늘의 사정과 관련하여 퇴계의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언급해보겠다는 것이다. 『성학십도』는 임금으로 하여금 국정(國政)에 대비할 수 있게 하는 심성의 훈련을 설명하기 위하여 유학(儒學)의 고전적인 문장을 집약한 것이다. 그렇기는 하나, 여기의 충고는 임금이 아니라도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누구나 지켜야 할 사항들을 포함한다. 그 가운데 주자의 경재잠(敬齋箴)은 특히 만사에서 행동 지침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일에 당하여서는 그 일에만 마음을 두어, 그 마음 씀이 다른 데로 가지 않도록 하라. 두 가지, 세 가지 일로 마음을 두 갈래 세 갈래 내는 일이 없어야 한다.” 자명한 지침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조심스러운 집중이 세월호 운항에서도 필요한 것이었던 점은 사실이다.

어떻게 해야 이러한 집중이 보장되는가. 말할 것도 없이 이 집요(輯要)에 열거된 열 개의 지표에 따라 공부하고 수양하는 것이 그것을 몸에 붙이게 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더 간단한 조건은 잠(箴)의 첫 부분의 설명에 나와 있다. “의관을 바르게 하고, 눈매를 존엄하게 하고, 마음을 가라앉혀 가지고 있기를 마치 상제(上帝) 대하듯 하라. 발가짐(足容)은 반드시 무겁게 할 것이며, 손가짐(手容)은 반드시 공손하게 하니, 땅은 가려서 밟아, 개미집 두덩(蟻封)까지도 (밟지 말고)돌아서 가라. 문을 나설 때는 손님을 뵐 듯해야 하며, 일을 할 때(承事)는 제사를 지내듯 조심조심하여, 혹시라도 안이하게 함이 없도록 해야 한다.”

의관이나 손발을 바르게 갖춘다는 것은 몸가짐에 대한 주의사항을 말한 것이다. 여기의 몸단속하라는 지시는 억압적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몸가짐이 마음의 형성에 영향을 준다는 것은 현대 심리학에서도 인정하는 인간 심리의 한 특징이다. 몸가짐이 어때야 하는가를 다시 살피면, 몸은 한편으로는 ‘존엄하게’ ‘무겁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공손하게’ 하여야 한다. 그러면서 행위의 극히 작은 외표에까지 마음을 써야 한다. 그래서 걸음을 걸을 때 개미집 두덩도 다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주목해야 할 것은 행동의 전체적인 테두리다. 일을 처리할 때에 제사 지내듯이 하여야 한다는 것은 그 테두리를 시사한다. 조선조 사회에서 의례(儀禮)는 가장 중요한 공적 행사이었다. 그리고 사적인 행동의 방식도 그에 준했다. 의례란 인간의 행동을 양식화하는 것이면서, 전체적으로는 종교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상제(上帝)에 대한 언급이 나온 것은 당연하다. 상제는 신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세속적인 통치자를 비유적으로 확대한 것이기도 하다(어원적으로는 그 반대라고 할 수도 있다). 상제의 존재가 가리키는 바 초월적이면서도 세속적인 질서가 존재한다는 것이 여기에 상정돼 있다. 이 테두리가 모든 인간 행동에 엄숙성을 부여한다. 그것은 다른 사람에 대한 조심스러운 마음과 태도에도 적용된다. 손님을 예의로서 대하여야 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큰 질서, 우주적 질서의 일부라는 전제로부터 저절로 도출된다. 거기에 작용하는 마음을 가리키는 말이 경(敬)이다.

권력도 상징적 의미 가져야 현실 움직여
이렇게 풀이해 보면, 일의 신중한 처리를 보장하는 것은 이러한 질서이다. 이것을 상제나 황제가 대표한다. 그러나 질서가 반드시 권력으로 강요되는 것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그 질서의 힘은 현실적인 것이면서 상징질서에서 나온다. 그렇다면, 이러한 질서의 힘이 사라진 곳에서 조심스럽고 성실한 일의 수행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일까. 세속화된 세계에서 질서를 유지하는 힘은 오로지 현실적 힘-강제력이다.

그러나 대체로는 권력도 상징적 의미를 가짐으로써 참으로 현실을 움직이는 힘이 된다. 상징은 마음의 안으로부터 사람을 움직인다. 그때 강제력에 대한 무서움은 보다 일반적인 두려움이 된다. 그리고 그것이 우주적 질서에 이어질 때, 그것은 외경심이 된다. 유교에서 ‘공구(恐懼)’-두려워하고 경(敬)의 마음을 갖는 것은 수신의 목표이다. 이것은 상제의 질서에 뒷받침되면서, 편재(遍在)하는 자연의 질서에 의하여 직접적으로 표현된다. 거대한 자연의 힘은-물론 그것을 실감하는 경우-사람으로 하여금 두려움으로 그 신비를 우러러보게 한다. 한스 요나스와 같은 환경 철학자는 자연에 대하여 사람이 갖는 두려움 또는 외경심(畏敬心)을 환경 존중의 심리적 자원으로 말한다. 이 두려움은 특히 큰 규모의 자연현상을 대면할 때 느끼는 감정이다. 높은 산이나 바다는 그러한 두려움 또는 외경심을 불러일으키는 대표적인 자연이다. 삶도 자연 또는 그 신비의 일부이다. 사람의 실존적 불안감도 목숨의 위태로움에 대한 느낌이 사람의 마음 깊이에 서려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죽음은 인간 존재의 허약함과 무상함을 말하는 절대적인 사실이다. 서양 중세에는 해골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죽음이 사람의 운명이라는 것을 명상하는 풍습이 있었다. 이 해골 자체를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말로 부르기도 했다.

오늘날 죽음은 물론 자연의 두려움, 그리고 그 한계 안에서 영위되는 삶의 엄숙성은 너무나 쉽게 잊히고, 그것을 기억하는 일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 되었다. 자연의 두려움은 사람의 힘에 의해 거의 통제·조정될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과학기술은 나날이 이를 위한 새로운 장치를 만들어낸다. 쏟아지는 정보는 사람에게 거의 영생불사(永生不死)를 약속한다. 금전과 권력만 있다면, 이 모든 것이 확보될 것처럼 보이는 것이 오늘의 시대다. 정부를 포함해 모든 사회 조직과 기구도 이러한 삶의 통제와 조정의 완성을 지향하고 약속한다. 그리하여 잘못되는 일은 당연히 그 수령이 책임져야 하는 일이다.

외경심은 올바른 일처리의 출발점
위에 말한 두려움과 외경심의 현실적 의미는 그것이 마음을 집중하여 일을 바르게 처리할 수 있게 하는 심리적 준비가 된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러한 집중에 이르게 하는 큰 감정을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 오늘의 세상이다. 그러나 다른 종류의 큰 감정은 줄어들었다기보다는 불어났다고 할 수 있다. 조심스러움을 강조하는 외경심이 아니라도 큰 감정은 행동의 동력이 된다. 외경심은 큰 질서에 비추어 자신이 그 질서의 일부라는 것과 함께 자신의 작음을 깨닫게 한다. 분노와 같은 정치적 큰 감정도 큰 현실의 존재를 알게 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작은 존재가 아니라 큰 것의 일부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 그리하여 그것은 정치에 동원될 수 있는 힘이 된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 문제에 대한 현실적 대처로 직결되는 것은 쉽지 않다. 외경심은 주의 깊은 자세를 낳는다. 다른 큰 감정들은 조심스러운 반성으로 이어지지 아니한다. 다만 그러한 감정들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지시할 수는 있다. 필요한 것은 그에 대한 이성적 검토이다. 이성은 위태로우면서 보다 넓은 세속적 가능성으로 사람의 마음을 열 수 있다.

정치적 관심이 큰 작가였던 브레히트는 감정과 현실적 깨달음이 이어져야 한다는 것을 내세우는 특이한 연극 이론을 만들어냈다. 그의 생각으로는 연극은 등장인물에 대한 공감과 동정을 표현하면서도 그로부터 거리를 유지하여야만, 총체적 의미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리하여 생기는 효과가 연극의 공감으로부터 사람을 떼어놓는 유명한 ‘소외효과’다. 과장된 감정적 일치를 강조하는 연극은 소원과 두려움을 섞어 ‘거짓된 세계’를 만들어 관중을 현혹한다(브레히트의 시 ‘무대, 꿈의 자리’). 이에 대하여 현실적 진실을 추구하는 연극은 이러한 환상의 창조를 멀리 하여야 한다. 일상생활에서도 사람들은 사건의 주인공을 흉내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모방에 완전히 흡수되지는 않는다. 모방자가 모방되는 사람의 감정과 견해를 완전히 같이하는 것도 아니다. 심장이 하나가 되어 뛰거나 머리가 하나의 생각으로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공감은 사태 설명의 한 부분일 뿐이다(‘일상생활의 무대에 대하여’).

이러한 점은 격앙된 감정에 의존하고자 하는 정치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영웅적 열광과 행동은 정치가 가지고 있는 매력이고 유혹이다. 그러나 참으로 인간을 위한 정치는, 정의롭고 행복한 삶의 질서를 안착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 테두리 안에서 직무와 도덕적 의무에 충실한 행동들은 자연스러운 것이 된다. 물론 현대의 세속적 삶의 테두리 안에서 정치가 조심스런 일 처리, “일에 당하여서는 그 일에만 마음을 두어, 그 마음 씀이 다른 데로 가지 않도록” 하는 승사(承事)가 보장될 수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그러한 세계에 대한 그리움이 보통 사람들의 마음에 들어 있는 것은 틀림이 없다. 세월호의 비극은 성실성이 사회적 의무 수행의 필수 요건이라는 것을 증언한다, 이번 선거의 결과는, 감정의 격앙 또는 아지프로(agitation propaganda)를 넘어서 현실적 문제에 대한 현실적 해결이 사람들이 정치에서 바라는 것이라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 아닌가 한다.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서울대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뒤 미국 하버드대에서 미국문명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7년 첫 저서 『궁핍한 시대의 시인』 이후 『지상의 척도』 『심미적 이성의 탐구』 『자유와 인간적인 삶』 『기이한 생각의 바다에서』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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