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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구도 타파' 동지 김부겸·이정현의 우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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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지난 7·30 재·보궐선거 순천-곡성에서 당선된 새누리당 이정현 의원(오른쪽)과 6·4 지방선거 대구시장에 출마했다 낙선한 새정치민주연합 김부겸 전 의원. 두 사람 모두 영호남 지역 벽 허물기에 앞장선 정치인으로 호형호제하는 사이다. 2012년 4·11 총선 뒤 둘이 만나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 [사진 매일경제]

여기, 당은 다르지만 같은 꿈을 꾸는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이 한 걸음 먼저 내디뎠지만, 목적지는 같다. 새누리당 이정현(56) 의원, 새정치민주연합 김부겸(56) 전 의원 얘기다.

 7·30 재·보선에서 이긴 후 일주일간 자신의 지역구인 전남 순천-곡성에서 머물던 이 의원은 서울에 올라온 7일 기자들과 만나 ‘김부겸’을 얘기했다.

 “김 전 의원이 군포라고 하는 새정치연합에 유리한 지역구를 버리고 자기 고향인 대구로 내려가서 출마했다. 해보지 않은 사람은 그게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이란 걸 모른다. 저 역시 호남에서 한결같이 출마했기 때문에 그분 심정을 잘 알고 그분 뜻을 무척 존경한다.”

 시간을 돌려, 재·보선 이튿날인 지난달 31일 저녁. 김 전 의원은 서울 광화문에서 지인들과 함께 있었다. 이 의원 당선이 화두에 올랐다. 참석자 중 한 명이 ‘이정현’을 언급하자 그는 “그 심정은 나밖에 모른다”며 손을 빨개진 눈자위로 가져갔다. 그러면서 가만히 말했다.

 “일부에서는 1년10개월짜리 의원으로 평가절하하는 사람이 있는 모양인데, 그건 그럴 수 없다. TV로 선거운동하는 걸 지켜보는데 남의 일 같지 않았다.”

 두 사람은 “형, 동생” 하는 사이다. 호적상으로 두 사람은 ‘58년 개띠’로 동갑이다. 하지만 김 전 의원은 56년생들과 함께 학교를 다녔다.

 두 사람의 정계 입문은 판이하게 달랐다.

 전남 곡성 출신인 이 의원은 1984년 새누리당의 전신 중 하나인 민정당 당료로 정치에 발을 들였다. 의원 비서관을 지내다 당에 특채됐다. 정당인이 됐지만, 역설적이게도 민주화 이후 위기가 찾아왔다. 88년 13대 총선부터 도입된 소선거구제로 ‘영남당’의 색채가 짙어졌기 때문이다. 호남(전남 보성) 출신으로 이 의원의 고등학교(살레시오고) 한 해 선배이자 같은 시기 민정당 당직자였던 정양석 전 의원의 전언.

 “소선거구제 이후 당이 급속도로 ‘경상도화’ 돼갔다. 중·하위 당직자였던 우리는 설 자리가 없었다. 핵심 부서인 기조·조직·총무국에 보내질 않더라. 이때부터 몇 안 되는 호남 출신 당직자들의 각개약진이 시작됐다.”

 이 의원은 유독 에너지가 넘쳤다고 한다. 대변인 행정실에 근무할 때는 “집에 가면 컴퓨터를 아이들이 독차지한다”는 이유로 PC방에서 밤늦도록 언론 보도를 분석하고, 누가 보든 안 보든 논평을 내 다작(多作)으로 조금씩 ‘이정현’ 이름 석 자를 각인시켰다.

 반면 서울대 정치학과를 나온 김 전 의원은 이른바 ‘엘리트 운동권’ 출신이다. 77년 유신반대 시위를 주동해 구속·제적됐다. 전두환 정권에 의해 복학이 허용됐지만, 다시 서울대 복학생 대표로 학내외 민주화 시위를 주도하다 수배됐고, 5·17 계엄령 확대 이후 구속돼 다시 제적된 열혈 민주화 투사였다. 신촌 연세대 앞에 사회과학서적을 주로 다루던 ‘오늘의 책’이란 서점을 경영하던 중 재야 민주운동단체들이 연합해 만든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간사로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민주당 부대변인, 선대위 기획실장 등을 지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자 합류를 거부하고 민주당에 남았다.

 97년 신한국당과 민주당이 합당하면서 한나라당을 만들었고, 이때부터 2003년 탈당 전까지 이 의원과 같은 당에 있었다. 이때만 하더라도 두 사람은 “인사 정도 하는 사이”(김 전 의원)였다고 한다.

 두 사람이 각별해진 계기는 2012년 4월 19대 총선이다. 이 의원은 새누리당의 불모지인 광주 서구을에, 김 전 의원은 새정치연합의 불모지인 대구 수성갑에 각각 도전했다. 지역주의 벽에 막혀 낙선했지만, 이 의원(39.7%)과 김 전 의원(40.4%) 모두 의미 있는 득표를 했다. 이 의원의 표현대로 “지역주의 균열의 가능성”을 봤다. 이 균열은 둘 사이를 붙였다. 두 사람은 “각종 토론회 등에 동반 출연하면서 가까워졌다. 서로 격려와 위로가 됐다”고 말했다.

 이때부터 두 사람은 안부와 조언을 주고받는 사이가 됐다. 이 의원이 낙선 후 박근혜 정부의 청와대 홍보수석과 정무수석을 지내는 동안에도 두 사람의 관계는 이어졌다고 한다. 서로 다른 편에 속한 정치인으로서, 조심스러운 우정을 나눈 셈이다.

 6·4 지방선거에서 김 전 의원이 먼저 지역주의 깨기에 다시 도전했다. 대구시장 선거에 나가 40.3%를 득표했지만 새누리당 권영진 후보(56.0%)에게 졌다. 정치권에선 “새누리당이 권영진이라는 젊고 쇄신 이미지의 후보를 내지 않았으면, 졌을 수도 있다”는 관전평이 나왔다. 특히 19대 총선부터 공을 들여온 수성구 지역의 득표율은 ‘권영진 49.33% 대 김부겸 47.49%’로 2%포인트도 차이 나지 않았다.

 두 달이 채 지나지 않은 7·30 재·보선에 이번엔 이 의원이 도전장을 내밀었다. 김 전 의원이 이 의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 전 의원=“어려운 결정인데, 진짜 가는 건가.”

 ▶이 의원=“간다. 죽을 각오로 호소할 작정이다. 대구가 (김부겸에게) 40% 줬다면 저쪽(호남)도 뭔가 반응이 있지 않겠나. 나도 해보겠다.”

 선거 당일, 이 의원은 한잠도 못 잤다. 개표 초반부터 “곡성뿐만 아니라 순천에서도 이긴다”는 얘기가 전해졌다. 선거 이튿날, 밤을 꼬박 새우고 당선 인사를 한 이 의원의 행색은 땀에 절어 있었지만 하고 싶은 말은 또렷하게 했다. 특히 “앞선 도전이 완고한 지역주의에 균열을 갖고 왔다”며 김 전 의원이 지난 총선에서 기록했던 득표율 40.4%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이 의원 못잖게 개표 상황에 눈을 못 뗀 이가 김 전 의원이다.

 “개인 이정현에 대한 짠함이 있다. 한때 1%를 얻었던 사람이 19년 만에 뜻을 이뤘다는 것은 한 편의 드라마다. 솔직히 대구에도 뭔가 호소할 강력한 무기가 생겼다는 생각이 들더라. 표를 안 주는 구실 중 하나가 ‘호남은 안 변하는데 우리만 변해야 하느냐’였는데 그게 무너진 거다. 지역주의는 실체가 없고 정치인들만이 이용해 온 악마의 주술 같은 것이란 걸 이제 대중이 본능적으로 느낀다.”

 정치인이 조장해 온 지역주의. 이 의원도 같은 얘기를 했다.

 “김 전 의원이 두 번의 선거에서 굉장히 높은 득표율을 올렸던 것은 그쪽(대구) 유권자들 역시 지역분할 구도에 대해 투표 결과로 뜻을 표출했기 때문이다. 대구가 됐든, 호남이 됐든 그냥 당만 보고 찍는, 그러한 선거 구도는 끝에 다다르고 있다.”

 두 사람은 선거 이틀 후 다시 통화했다.

 ▶김 전 의원=“축하한다. 큰일 했다.”

 ▶이 의원=“(울먹이며) 형 봤제. 나 해냈소.”

 ▶김 전 의원=“정말 큰일 했다. 진짜로 지역주의란 괴물이 비틀거리기 시작한 것 같다.”

 김 전 의원에게 이 의원의 승인을 물었다. 그는 절박함에서 나오는 몸부림이라고 답했다.

 “몸부림 자체가 격정적이다. (어느 의원이든) 자기 강세 지역에선 그렇게 선거운동을 안 한다. 자전거 타고 다니면서 진한 사투리로 ‘한 번만 써봐 주쇼, 나 일 한 번 시켜주쇼’라고 하는 것 호남 유권자들도 처음 봤을 거다. 정권의 실세라는 사람이 그렇게 하니까 ‘일 좀 시켜봐도 되겠구나’라는 진정성을 느낀 것 아니겠나.”

 두 사람의 도전은 끝나지 않았다. 2016년 4월 20대 총선이 또 남아 있다. 이번 승리로 이 의원 주변에선 벌써 차기 인물론을 거론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본인은 “내 분수를 잘 안다”고 겸손해하지만…. 김 전 의원이 1년8개월 뒤 ‘꿈’을 이룬다면 그 과실은 더 크다. 대선을 앞두고 야권의 대표주자로 급부상할 수도 있다.

 물론 지역주의에 맞서 싸워 이긴 정치인이라는 정치사적 의미는 기본이다.

[사진 설명]
1. 지난 7·30 재·보궐선거 순천-곡성에서 당선된 새누리당 이정현 의원(오른쪽)과 6·4 지방선거 대구시장에 출마했다 낙선한 새정치민주연합 김부겸 전 의원. 두 사람 모두 영호남 지역 벽 허물기에 앞장선 정치인으로 호형호제하는 사이다. 2012년 4·11 총선 뒤 둘이 만나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 [사진 매일경제]

사진=뉴스1,뉴시스

권호·이지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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