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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풍과 눈보라 속에 빙벽과 사투57시간|그랑 조라스 북벽등정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여기는 정상! 주위의 모든 산들이 우리 발 아래 있다. 우리는 해냈다. 세계 3대 북벽을 우리는 해냈다』
정상에서의 울먹이는 소리가「베이스·캠프」의 「트랜시버」를 울리는 순간 통신담당 임덕용대원은목이 콱 메었다. 「트랜시버」에 귀를 기울이고 둘러선 영국·「이탈리아」·일본등 외국등반대원 30명의 박수와 함성이 일제히 터지며「베이스· 캠프」를 뒤흔들었다. 『축하한다. 수고했다. 이 기쁨을 온 국민들께 돌린다.
「베이스·캠프」는 함성과 흥분으로 휩싸였다. 한국「그랑·조라스-마테르호른」북벽원정대공격조(윤대표·허욱·유막규)가 정상에 서던 순간 구름 한점 가린것없이 전나를 드러낸「그랑·조라스」북벽, 그 정상과「베이스·캠프」에 정오의 태양은 눈부시게 쏟아져내리고 있었다.
1980년8월20일 낮12시10분(한국시간 같은날 하오8시10분)「그랑·조라스」북벽은 <악마의 이빨>이라는 별칭 그대로 너무나 험난하고 하루에도 대여섯번씩 그모습을 달리하는 마술사였다.
검붉은 암벽에 햇빛이 비치면 신비로운 웅자로 사람들을 매혹하다가 눈깜짝할 사이에 눈보라의 「베일」 로 그 얼굴을 가린다. 금시 무너져내려 모든것을 덮쳐버릴듯한 깎아지른 빙벽-.눈에 현기증이 인다.
××
『본부 나오라, 본부 감잡았으면 응답하라』
『여기는 본부, 감잡았다, 오버』 『비가 계속 내린다. 우리「루프」는 수로가 되었다. 폭포처럼 물이 쏟아진다』
『다른 「팀」 은 어떤가?』
『악5분전「멕시코·팀」도 철수했다. 우리 뿐이다. 몹시 춥다』 『알았다. 최선을 다하라.』
3천m 이상에서는 여름도 여름이 아니다.
「베이스·캠프」엔 일순 긴장이 감돈다.
선두의 윤대표대원이 몸의 중심을 잃는 순간 거꾸로 굴러 떨어졌다. 유한규대원이 재빨리 제동을 걸어 20m나「로프」가 풀려나간 다음에야 추락은 멎었다.
바둥거리며「테라스」에 올라선 윤대원은 전신에 타박상을 입었다. 옆구리가 결리고 몸놀림이 아주 거북했다. 더구나 아주 귀중한 장비인 「아이겐」 한쪽을 띨어뜨려 버렸다. 신 한짝을 잃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랑·조라스」는 햇빛을 받으면서 등반대원들을 유혹한다. 저녁놀과 함께 중앙일보·동양방송의 취재용「헬리콤터」가 왔다. 자연과의 고독한 투쟁에서 커다란 원군을 만난 셈이다.
이튿날도 하루종일 인간의 필사적인 의지와 빙벽과 암벽의 피땀흘리는 줄다리기는 계속되었다.「알프스」특유의 날씨는 싸락눈과 우박을 세차게 퍼붓는다.
강풍이 몰아치고, 구름은 오락가락한다. 어떻게든 올라가야만 살수 있다. 어둠속에서 찍고, 차고, 매달리는 아슬아슬한 곡예의 연속끝에 작은 「데라스」 에 도착했다. 라면상자룰 세워놓은 정도의 크기다.
시간은 하오 11시35분.더이상 움직인다는 것은 자살행위다. 추위와 허기에 지친 대윈들은<이것은 「알피니즘」 이 아니라 전쟁이다라는 「아르망· 샤롤레」의 말을 실감했다.
두번째 밤의 「비브왝」 (노숙)도 첫날밤이나 다름 없었다. 너무 추워서 잠을 깼다. 서두를 필요는 없다. 곧잘 부르던 산노래로 불안을 달래며 시간을 보냈다.
일주일 전에 추락하여 구조된 영국대원이 버리고간 뒤엉킨 「로프」를 뒤로하고 대설벽에 올라선 시각이 정오쯤. 눈앞이 탁 트이며 바람이 확 불어온다. 정상에 이르는 능선이다. 바로 눈앞에 정상이 기다리고 있다. 「베이스·갬프」를 출발한지 57시간10분만이다.
드디어 올랐다. 정상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부둥켜 안고 대원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애국가를 불렀다. 저멀리 계곡에서는 안개처럼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으른다. 귀는 멍멍하고 눈물어린 눈에 태양은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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