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2)제69화 한국은행(15)-장병위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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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대전에서는 국방부를 제외하면 정부부재의 상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대구에 내려온 다음 ,정부는 비로소 어느 정도 체제를 정비하고 전시 대책에 부심했다.
7월19일 대통령긴급명령 제4호로 금융기관예금대불에 관한 특별조치령를 공포하여 피난한 예금주에 대해서는 1주일 1만회 이내,1개월 3만원을 한도로 피난지 금융기관에서 예금을 대신 지급할 수 있는 조치를 취했다.
서울 기타 적침지역에 소재하는 금융기관에 예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피난지에서 돈이 없어 고생하고 있는 피난민을 위하여 예금통장 또는 예금증서와 인감만 제시하면 어느 금융기관에서든지 예금을 내주도록 한 것이다.
7월25일에는 재무부령으로「금융기관 예금 등 지불에 관한 특별조치령 시행규칙」을 지시했다. 이것은 6월28일자로 시행된 특별조치령 제2조 「정부는 금융기관의 예금 기타 자금의 지불을 제한 할 수 있다」는 규정에 의하여 개인예금에 대해서는 1가구당 1주일 2만원이내,1개월 7만원으로 지불을 제한하고 공공예금·법인·단체예금에 대해서는 봉급, 임금 및 여비 등 인건비에 한하여 지불할 수 있도록 조치한 것이다.
또 7월26일에는 한·미간에「UN군 경비지출에 관한 협정이 체결되어 한국은행은 UN군에 대한 대여금 형식으로 UN군 전비를 본격적으로 지원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정부와 은행이 점차 정상을 되찾아감에 따라나는 몸과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되어 일선위문을 떠나기로 했다.
의성에 있는 사단사령부에 설명을 듣고 육군대령의 안내로 안동방면을 향해 출발했다. 아무리 가도 연대지휘소를 찾을 수 없었다. 잘못하다가는 위험지대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끝에 겨우 찾아낸 연대지휘소는 돌다리 밑에 있었다.
춘천에서부터 후퇴해서 안동작전에 참가, 그 전날 있었던 격전에서 상당한 희생자를 냈다는 것이다. 연대장은 적의 화력이 너무 강해서 일단 후퇴했으나 다시 공세를 취하여 기어코 희생된 부하들의 복수를 하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사선을 넘고 넘은 장병들의 기백과 사기는 충전했지만 적에 비해 너무나 열세에 놓인 우리 화력이 안타까왔다. 연대장 이하 장병들을 격려하고 위문품을 전달한 다음 그곳을 떠나「도리동」이라는 부락근처까지 왔다.
나를 안내하던 대령이 하는 말이 친한 친구가 도리동 작전을 지휘하고 있는데 여기까지 왔으니 그 친구를 만나고 가야겠다는 것이다. 나보고는 이곳에서 기다려 달라고 했지만 일선위문을 위해 여기까지 같이 온 이상 나도 가겠다고 동행했다.
「도리동」 부락 전면에서 격전이 벌어지고 있고 부락에서는 불길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제대로 된 「들것」 하나가 없어 널판대기로 부상병을 나르고 있었다. 엉엉 울면서 부상병을 후송하는 군인이 있어 사연을 물은 즉 부상병은 바로 그의 아우라는 것이었다. 감격해서 나 역시 눈물짓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을을 빠져나가자 바로 눈앞에 접전이 전개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대령은 언덕이 적의 시야를 가려 안전한 지점에 나를 인도하고 이 곳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나는 차마 더는 따라가겠다고 할 수 없었다. 그 언덕을 벗어나기만 하면 적의 총탄앞에 노출되는 것이다.
그 대령은 총탄을 뚫고 혼자 다녀오더니 이토록 격렬한 전투가 전개되고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며 위험하니 빨리 돌아가자고 했다. 「지프를 되돌려 후퇴를 하는데 왜 그렇게 겁이 나는지, 그토록 겁에 질리기는 생전 처음이었다. 적을 향해 전진할 때에는 무서운 줄 몰랐다. 그런데 막장 후퇴를 하게 되니까 겁이 나고 더군다나 우리를 발견하고 적군이 발사하는 박격포탄이 전속력으로 달리는 우리「지프를 쫓아와 혼이 났다.
내가 일선위문을 떠날 때 위문 외에 또 한가지 사명이 있었다. 군량미가 낭비되고 있는 것 같으니 일선에 가면 실정을 살펴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일선에 가서 실제로 보니 도대체 격전중인 병사들은 밥을 먹을 틈이 없었다. 적군에 비해 병력·화력이 열세이니까 잠시도 쉴 수가 없는 것이다. 취사병이 주먹밥을 갖다주어도 밥먹을 틈을 낼 수가 없어서 굶어가며 싸우고있고 한편 그 더운 여름철에 밥은 쉬어서, 못 먹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취사병도 밥만하는 것이 아니라 부상병을 나르고 또 치료하고, 총도 쏘았다. 격전장에서는 때맞추어 끼니를 잇는다는 사치가 통하지 않았다.
나는 대구에 돌아와 최정주 장관에게 후방에 앉아서 양곡이 낭비가 되느니 어쩌니 그따위 잠꼬대 같은 소리하지 말라고 호통을 쳤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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