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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58)영오 6o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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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64년에도 제작 편수는 계속 늘어나 1백37편을 기록했다. 그것은 이미 국내 수급 편수를 초과하는 현상이었다.
그 즈음의 한국영화는 정부의 국산영화 보호책과 「텔리비전」의 미보급. 대중 「레저」수단의 전무 등으로 인하여 대중오락의 대종구실을 했다. 따라서 영화는 해마다 극성스럽게 쏟아져 나왔다.
그런 풍작속에서도 영화법에 대한 영화인들의 불만은 대단하여 한국영화인협회는 64년 현행 영화법과 영화 금고운영에 대한 비만 강연회를 시민회관에서 개최, 영화인 협회 열띤 호응을 받았다. 그때의 연사는 이항령 백직이었다.
62년 1월2o일에 처음 제정, 공포돼 63년 3월 12일에 1차 개점된 영화법에서 문제가 된 골자는 다음과 같다.
우선 영화업자 등록에 따른 시설기준 문제였다. 35mm이상 촬영기 3대이상, 조명기(송성능 50kw이상), 건평 2백평 이상의 견고한 시설로 된 「스튜디오」, 녹음기 1대 이상, 전속영화감독, 배우 및 녹음기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당시로는 비현실적이고 꽤 번거로운 조건이었다. 영화인들은 영화법 전체가 40년대 일본 영화법과 비슷하며, 영화에 대한 기업의 통제 및 문화행정상의 통제를 행하여 영화산업의 국가관리를 지향하려는 강권주의 냄새를 강하게 풍기고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전속영화인에 대해선 감독의 경우 5년 이상의 경력자로 3명 이상, 배우의 경우 5편 이상 극영화에 출연한 경험을 가진 남녀 배우로 각각 10명 이상, 녹음기사의 경우엔 5년이상 경력자라야 된다고 못박고 있었다.
그래서 이 등록 요건을 갖추는 데에만도 약 3천만원(당시)의 자금이 들어 영화업자들은 이 시설기준 때문에 영화 1편을 제작하기도 전에 채무에 눌려 도산하고 만다고 비명을 질렀다.
더군다나 많은 영화업자들이 시설요건만 갖추기 위해 촬영기재등과 「스튜디오」시설을 허위로 조작, 등록해 이 법이 현실적으론 공전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연기자들의 전속제도도 전혀 현실성이 없었다.
즉 연기자의 절대수가 부족한 실정에서 1개사에 20명씩(20명×19사=3백80명)규정한 것은 무리였으며, 배우들의 이해관계에서 오는 전속제도의 반대로 사실상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등록을 위해 명의만 차용하는 결과가 됐다.
이에 따라 유능한 영화인이 등록하지 못함으로써 제작에 참여하지 못하고 탈락됐으며, 결국은 등록업자의 이름을 빌어서 하는 대명제작 등의 비합리적인 사태가 쏟아져 나왔다.
이렇게 되니 영화인들은 64년 한국영화인협회 산하 각 분과위원회가 주축이 되어 「영화법 폐기 추진위원회」를 발족, 영화법폐기의 투쟁에 나섰다.
이 추진위원회엔 한국영화제작가협회 재건위원회·한국외화수입배급협회 재건위원회·전국극장연합회가 적극적으로 가담, 그 열기는 더해 갔다. 그러나 이 영화법은 곧 개정되지 않았고 66년 8월에 가서야 일부가 2차 개정됐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나는 『상처받은 두 여인』이란 영화를 감독하게 됐다. 58년 내가 감독했던 『음춘비가』의 제작자 방의석이 찾아와 자신이 쓴「시나리오」가 있으니 감독을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제작비는 아는 이가 대기로 했고 모자라는 액수는 지방 흥행사에게서 끌어대어 뒤를 받치면 된다는 것이었다.
감독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의 얘기를 듣고 보니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제작비가 확보된 것도 아니고 여기저기서 끌어들여 만들어 보자는 주먹구구식 제작이었다. 나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방의석이 하도 자신있게 말하는 바람에 『그럼 해보자』고 제작에 나섰다.
촬영 이석출, 음악 김대현, 조명 황동춘으로 「스태프」를 짜고 김혜정 이민 이민자 하지만 등으로 배역을 정했다. 출연자 가운데 하지만은 당시 연극계의 원로로 이 영화에선 어부로 분했다.
영화는 한 건달의 애정 행각을 그린 것이었다. 건달은 짝사랑하던 「바·걸」을 살해하고 일본으로 도피한다. 그러나 밀선의 침몰로 한 고도에 닿아 섬 처녀의 순애로 개과천선한다는 것이 기둥줄거리였다. 처음부터 궁색한 제작이라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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