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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적 음식' 치킨 … 1년에 8억 마리 후다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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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16일 대구 두류공원에서 열린 치맥 페스티벌에서 영남대 외국인 학생들이 모여 치킨과 맥주를 즐기고 있다. 오른쪽부터 라노 로만(20·스웨덴), 쑹야오(宋?·25·중국), 스비아 폴슨(23·스웨덴), 아서 틸브룩(21·미국). 올해로 2회째인 치맥 페스티벌은 국제적인 행사로 발돋움했다. [대구=공정식 프리랜서]

지난 16일 대구 두류공원에서 열린 ‘치맥 페스티벌’(17~20일) 전야제. 오후 3시부터 공원은 치킨과 맥주를 찾아온 사람들로 들썩였다.

 “치킨 진짜 많이 먹어요. 매일 먹어요. 용돈을 그걸로 다 써요. 시켜 먹기 편하잖아요.”(정기성·한서대 1년)

 “족발이나 보쌈은 비싸잖아요. 치킨은 싼값에 배부르게 먹을 수 있어서 자주 먹어요.”(문필국·연세대 1년)

 “밤 10시 넘어가면 치킨 먹고 싶을 때가 있어요. 애들 셋이 좋아하는 브랜드를 번갈아 먹어요. ‘호식이’도 먹고 ‘종국이’도 먹고.”(이영근·55·대구시 대천동)

 “야구장에서 ‘치맥송’을 듣고 치맥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서울에서 KTX 타고 왔어요.”(캐나다 출신 애런 매킨지·25)

 서울에서 원정 온 대학생부터 치맥이 알고 싶은 외국인, 축제 구경 나온 동네 주민들까지 이날 하루 이곳을 찾은 사람의 수는 10만 명을 웃돌았다.

 종일 계속되던 폭염은 오후 들어 한풀 꺾이기 시작했다. 시원한 맥주에 치킨을 곁들이고 싶은 직장인들도 하나 둘 행사장으로 모여들었다. 밤 9시 록그룹 ‘노브레인’ 등의 공연이 펼쳐졌다. 비가 내렸지만 아무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몰린 곳은 시식행사였다. 치킨업체들은 1~2조각의 치킨을 시식용으로 나눠주고, 치킨 한 마리를 정가보다 2000~3000원씩 할인해서 팔았다.

 여름밤의 두류공원은 원래부터 치맥으로 유명했다. ‘폭염의 도시’ 대구 주민들은 저녁이면 두류공원에 돗자리를 깔고 더위에 지친 심신을 치맥으로 달래곤 했다. 올해 2회째인 치맥 페스티벌은 단숨에 국제적인 행사로 발돋움했다. 중국 저장(浙江)성 닝보(寧波)시가 대구시에 치맥축제 개최를 요청해 다음달 26~29일 닝보시에서 다시 한번 치맥 축제를 연다.

 “눈 오는 날엔 치맥인데….” 드라마 ‘별그대’의 주인공 천송이 덕분에 해외에서도 인기를 끌고 있다는 치맥. 치킨과 맥주의 합성어인 치맥은 어느새 한국인의 일상이 됐다. 치킨 전문점의 수는 3만1000여 개, 인구 약 1500명당 한 개꼴이다. 연간 소비되는 닭은 8억 마리에 이른다. 영업 중인 치킨 브랜드만 해도 250여 개다.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가 지난해 발표한 ‘국내 치킨 비즈니스 현황 분석’에 따르면 주거 및 근무지 1㎢ 내 영업 중인 치킨 전문점의 수는 약 13개에 달한다. 최근 경희대 국제교육원은 외국인 유학생들이 ‘가장 인상 깊은 한국 음식’으로 치맥을 꼽았다는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우리가 언제부터 치킨을 먹기 시작했을까. 1950~60년대엔 주로 닭 백숙을 먹었다. 생닭에 쌀과 인삼·대추 등을 넣고 푹 고아서 먹는 보양식이었다. 치킨의 원조인 전기구이 통닭이 처음 등장한 것은 60년 ‘명동영양센터’였다. 누런 종이에 싼 통닭은 60~70년대 퇴근길 아버지의 어깨를 으쓱하게 만드는 가족들의 인기 메뉴였다.

 77년 최초의 치킨 프랜차이즈 ‘림스치킨’이 등장하고, 84년 미국 KFC가 상륙하면서 통닭의 시대는 저물었다. 닭을 조각 내서 기름에 튀긴 현재와 같은 치킨이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양념치킨을 처음 선보인 건 82년 대전의 ‘페리카나’다.

치맥을 즐기고 있는 정의형(25·왼쪽), 박현정(27·오른쪽)씨. 부산에서 버스를 타고 왔다.

 현재 업계 1위인 BBQ가 공격적으로 점포 수를 늘리기 시작한 건 외환위기 때다.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은 가장들은 별다른 기술 없이 소자본으로 가능한 치킨전문점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2002년 월드컵, 치킨집들은 몰려드는 주문에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사람들은 치킨과 맥주를 먹으면서 대한민국의 4강 신화를 지켜봤다. 한국팀의 승리에 환호하며 먹던 치킨은 축제의 음식이었다. 이때를 기점으로 치킨집의 수는 더욱 늘기 시작했다.

 “하지만 2002년 같은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2003년을 시작으로 조류인플루엔자(AI)가 2~3년마다 발생하면서 힘든 시기가 이어졌습니다. 조기퇴직과 취업난으로 너도나도 치킨집을 열면서 경쟁은 심해졌고요. 새로 개업하는 치킨집 2곳 중 1곳은 3년을 못 버티고 문을 닫았습니다. 올해도 월드컵 특수를 기대했지만 결과는 ‘아니올시다’였죠. 세월호 참사로 줄어든 매출은 아직 회복되지 않고 있습니다.”

 최근 치킨에 얽힌 음식문화를 다룬 『대한민국 치킨展』을 펴낸 정은정씨의 말이다. 그는 치킨을 “문제적 음식”이라고 정의했다. 청년실업과 조기퇴직, 대형 프랜차이즈업체와 소규모 자영업자들의 갑을 관계, 수익 악화에 시달리는 양계농가들의 애환 등이 치킨 한 마리에 녹아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최근의 치킨은 한국 사회의 현실을 풍자하는 소재로도 즐겨 쓰인다. ‘1~3등급은 치킨을 시키고, 4~6등급은 치킨을 튀기고, 7~9등급은 치킨을 배달한다’. 지난해 ‘어느 고3의 명언’이라는 제목으로 화제를 모은 글이다. 이 말은 최근 ‘수능 등급과 치킨의 상관관계’라는 제목으로 다시 한번 회자되고 있다. 대학생들은 “문과생들은 졸업하고 바로 치킨집을 차리고, 이과생들은 취업했다가 잘려서 치킨집 차린다”는 자조 섞인 농담을 주고받는다. 학생·직장인 모두 웃게 만드는 공감 만점의 농담이지만 듣는 이 누구나 마음 한구석이 편치 않다. 치킨집을 운영하는 ‘사장님’들의 마음은 더욱 그렇다.

 17년 동안 치킨집을 하다가 지난해 ‘삼촌두마리치킨’ 체인사업을 시작한 박민철 대표. 16일 치맥 페스티벌에서 만난 그는 “치킨사업이 레드오션인 건 맞습니다. 요즘엔 닭 장사 한다면 ‘돈 없어 그런다’ 비아냥대는 것 같아요. 하지만 판단 잘하고 열심히 하면 안 될 것도 없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했다.

 그날 그는 뜨거운 더위와 싸우며 종일 서서 천막을 지켰다. 비가 와도 우산을 쓰지 않던 그는 웃는 얼굴로 열심히 치킨을 날랐다.

[S BOX] 치맥, 음식궁합은 별로라네요

◆외국 닭 2.5㎏, 국산 닭 1.5㎏=미국인들은 닭 가슴살을 좋아해서 가슴이 발달하고 덩치가 큰 품종의 닭을 주로 키운다. 한국 사람들은 닭 다리를 좋아하고, 삼계탕을 많이 먹기 때문에 그보다 작은 닭을 키운다. 외국 닭의 무게는 평균 2.5㎏이지만 국산 닭은 1.5㎏ 정도다. 대한양계협회 이홍재 부회장은 “뼈가 있는 치킨이나 통닭은 거의 국내산 닭고기로 만들지만 순살은 수입육을 쓰는 경우가 있다”고 말했다.

 ◆복통·설사 이유 있었네=음식궁합 전문가들은 치킨과 맥주가 어울리지 않는 음식이라고 한다. 기름기가 많은 음식을 먹으면서 차가운 음료를 마시면 복통이나 설사를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은정씨는 『대한민국 치킨展』에서 “느끼한 맛을 싫어하는 한국인들이 느끼함을 줄이려 시원한 맥주를 곁들이거나 매운 양념소스를 더해서 먹기 시작했다 ”고 설명했다.

 ◆프라이드는 흑인 노예 음식=프라이드 치킨은 원래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끌려온 흑인 노예들의 음식이었다. 로스트 치킨을 주로 먹는 농장 주인들과 달리 노예들은 닭고기에 각종 향신료를 첨가한 후 기름에 튀겨 먹었다고 한다. 프라이드 치킨 맛의 고향이 켄터키(KFC)나 루이지애나(파파이스)인 것도 이 때문이다.

박혜민 기자, 대구=김민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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