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중앙문예」문학평론 당선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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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4. 고난과 부활의 원형적 의미.
하나의 존재가 우주공간 속에 생성되면 그것은 성장하고 발전하여 일정한 단위의 시간이 지나면 죽음을 맞는다. 그러나 그 존재의 소멸은 형태적 소멸일 뿐 물자체(dingan sich)의 소멸일 수 없다. 본질적 존재는 하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과정을 통해 보다 큰 규모를 지니고 재 탄생하게 된다.

<죽음-부활>의 신화적 상징성은 <떠남-돌아옴>이라는 개념으로 대치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죽음보다도 더 강한 부활의 「이미지」는, 떠남과 그에 따른 고난의 상황을 다루는데서 생긴 하나의 뚜렷한 인식을 통하여 다시 더 튼튼한 세력으로의 회귀과정을 거친다.
이성부 시 세계의 중요한 골격은, 삶의 일반적 질서이며 동시에 원형이라 할 수 있는 <고난과 부활>이다. 이 상징성은 그 외의 다른 요소들과 다양하게, 때로는 역설적으로 표현되어 우리는 시의 표층구조에 나타난 의미보다 심층 구조적 의미의 중대함에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그 심층의 의미는 전반에 흐르고 있는 통일성과 함께 이해되어야 한다. <고난-부활>을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진 시 세계의 사회적 측면도 역시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인간의 질서가 고난에서 시작할 때 그것은 필연적으로 공동체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게된다.
해마다 봄으로 떠난 사람들이(중략)
만나는 사람마다 만남을 알 수 없는
깊은 슬픔 속에 주저앉고 마는 모르는 땅의 모르는 몸들
-『귀향』에서

<떠남>과 이에 유사한 상실의 「이미지」들로 점철되어 있어 이것이 하나의 큰 고난의 과정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곧,
그리하여 그들은 돌아온다.(중략)
그들은 보다 힘차게 돌아온다.
-『귀향』에서
라고 역설적으로 이야기한다. 여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상실과 소멸은 부활하고 있다. 확실히 고난은 그 내부에 부활의 의지를 암시하고 있어 순수고난의 발전개념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언제나 마음을 대지 위에 세우고도 그 몸은 서지 못한다>라고 얘기한다. 고난은 쉽게 깨뜨릴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래서 일까 때로는 <무찌를 수 없는 적들만을 만나는 삶>이라고, 고난을 <적>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고난은 대지를 밟고 선 것인 만큼 내부 의지를 가지고 있다.
그가 고난의 상징으로 사용하는 것 중에서 가장 뚜렷한 것은 한국민족의 수난 처로 설정한 <백제와 전라도>다. 백제와 전라도는 역사적으로 불행과 수난과 박해와 멸시의 장이었기 때문에 그것의 고난은 현실의 고난을 대치시키기에 충분하였다. 고난을 피하여 숨은 <무등산 숯굴>의 의미라든가 <좋았던 벗님은 멀리 떠나고 눈부심만이 내방에 남아>있는 그런 우울함을 고난의 터와 연결시키고 있다. 그러나 그 고난은 다시 부활하여 항시 보다 큰 세력으로 당겨오게된다.
파도는 오지 않고
기다리는 배도 오지 않고 바다는 죽고 싶고
나도 답답하고. 그 어두움이다.
-『전라도 8』에서

<떠남과 돌아옴>의 원리가 이성부의 시에 특유한 것은 아니다. 이것은 일종의 생명의 원형을 이룬다. 「율리시즈」의 귀환이라든가, 석가의 깨달음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고난과 부활의 사이에서는 이렇게 볼 때 뚜렷한 통과제의(rite of passage)가 행하여지고 있다.
바위도 입을 열어 가르쳐 준다.
크낙한 슬픔의 처음에는 아무도 없고
마지막에야 함께 울어 주는 치운 살결이 있다는 것을.
-『저 바위도 입을 열어』에서
고난의 초기에는 힘의 부재상태이기에 어떤 상승의 흔적도 보이지 않으나 제의를 거친 마지막에는 공감을 가질 수 있는 <치운 살결>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즉 <기다리던 사람들이 불의 한가운데로 몰려가는> 것이고, <지금 죽어 가는 뼈 다음에는 기어이 살아남>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런 부활의 과정을 통하여 그가 제시하는 미래는 어떤 것인가? 그는 고난을 현재의 의미로, 부활에 의한 기쁨을 미래의 의미로 사용하여, 미래에 대한 적극적인 낙관을 표하였다. 미래는 고난을 헤쳐낸 뒤에 찾아오는 안식의 세계이며 세계인 듯 보인다.
그러나 끝끝내 이 새벽은 새벽바다
흔들리는 것들을 제자리에 세우면서
옳게 튼튼하게 뿌리를 박는구나
아아 비로소 나도 큰 눈을 뜨고
나를 떠나 나아가게 되는구나.
완성된 암흑의 한가운데로
미래의 처음으로]
-『새벽길』에서

<완성된 암흑>의 상징성이 던지는 낙관이 얼마나 확신에 넘치는가, 또한 미래로 향한 삶의 회귀가 얼마나 명증한가.
그의 시의 주요한 노력은 고난과 부활에서 오는 낙관적 미래를 곧 삶의 질서로 정립하려는 시도다. 부활이 그 자체로서 모순을 지니고, 힘과 사랑의 원동력이 경우에 따라 불균형을 이룸에도 불구하고 항시 낙관을 향하여 멈추지 않고 외침을 토한다. 이 낙관에 대한 피의 절규는 백제나 전라도로 상징되는 인간의 고난의 터에 대한 복귀를 부르짖는 것이며, 단순히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 또 다른 질서를 모색하기 위하여 삶과 투쟁하는 것이기도 하다.
현실의 고난에서 낙관적 미래로의 전이 과정은 하나의 역사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것은 삶의 자세이며 시를 쓰는 자세이기도 하며 고난을 뚫고 적극적인 힘의 문학을 형성하는 자세이기도 하다. 그의 시적 자세는 뚜렷한 이념에 의해 확고함을 갖추고 있는데, 그 이념은 사랑과 힘과 부활의지로 이루어져 있다.
힘과 사랑의 관계가, 때로는 사랑에 의한 힘의 발생으로, 때로는 적립되어 때로는 그의 많은 시에서 이들이 무관하게 드러나기도 한다.
그러기에 힘과 사랑의 관계를 필연적인 것으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힘과 부활의 관계라든지 사랑과 힘에 의한 부활의 관계는 뚜렷한 계층적 구조를 지닌다.
부활의 의지는 필연적으로 사랑과 힘에 의하여 생성되는 것이며 보다 근본적인 위치에서 공동체의 질서를 이끌어 가는 것은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즉 이성부의 기본적 구조성에 현실초극이라는 사상성을 주입함으로써 그는 시를 형태적으로 정립시키고 내용적으로 결정화시키는 것이다.
이성부의 시 세계는 이렇게 볼 때 지극히 간단한 요소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체계에는 아무런 모순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실상 힘의 개념을 퍽 다양하게(예를 들면 <불><칼><싸움><산하> 등) 표현시키면서도 그 내부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지 못하다는 점과 객관적 미래의 설정이 단지 존재설정으로 그치고만 느낌이 있다는 점을 단점으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또 그는 시적인 긴장을 요구하는 부분에서 시적 감정을 와해시키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으며 지나치게 도식적인 틀 위에 변형의 충격을 가하지 못하고 있다는 약점을 지닌다.
이런 결점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는 건전한 도덕성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생명력을 유지하게 된다.
작품 자체내의 예술성을 잃지 않으면서 미래의 「비전」을 제시한 점은 현대의 젊은 지성이 택하여야할 올바른 자세일 것이다. 그의 도전적이고도 능동적인 시작정신은 이게 새로운 방향으로의 미래 개념설정 및 인간질서를 위하여 정진해야할 것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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