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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어록」으로본 79년|가처분·유고 등으로 「대행체제」속출|10·26사건후 「정권교체」·「민주회복」등의 말 되살아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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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지난 한 해는 3·1운동후 60년만에 맞았던 기미년으로서 어쩌면 우리 민족과는 숙명적인 관계가 있지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격동의 연속이었다. 10대 개원국회가 백두진의 장선출 파동으로 막도 오르기전에 난항하더니 신민당 전당대회·YH사태·야당총재 직무정지 가처분소동·김영삼총재 서명파동·야당의원직 사표제출, 그리고 「10·26」사건·「12·12」사태 등 실로 현기증이 날 정도로 다사다난한 한해였다. 소용돌이가 크면 여파 또한 큰 것처럼 사건에 따르는 말도 풍년이었다. 그 어록을 펼쳐본다.

<감귤 잘못 이식하면 탱자돼>
○…고 박정희 대통령은 1월19일 기자회견을 하면서 『강남에서 잘 자라는 감귤나무를 강북에 이식했더니 감귤아닌 탱자가 열리더라』고 한국적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또다시 강조했다.
이청승 당시 신민당 대표는 4일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소위 유신이란 훌륭한 감나무를 심었어도 야당충고라는 밑거름이 없이는 고욤나무가 된다』는 대꾸로 응수했다.
그러던 정국에 파란이 일기 시작한 것은 유정회 의장인 백두진 의원이 구괴의장 내정설이 나온데서부터. 이대표의 해외여행으로 신민당 대표대행을 맡고 있던 고흥문 의원 등은 즉각 『지역출신 의원이 3분의 2가 되는데 구태여 유정회 의원을 국회의 얼굴로 내세우는 데는 문제가 있다』고 반박하고 나섰다.
박준규 공화당 의장서리는 백의장 선출에 협조하지 않는 야당태도에 노여움을 나타내면서 신민당 지도자를 가리켜 『단물만 빨다가…』라고 감정을 폭발시켰다.
야당은 야당대로 반대방법론을 싸고 당내 홍역을 치러쓴데 김영삼 의원은 『당이 무슨 결정을ㅇ 내리든 나는 퇴장한다』고 강경노선을 주도했고 이철승 댚는 『일방적 퇴장선언은 민주주의를 부인하고 독재를 하겠다는 속셈』이라고 반박했다.
이를 지켜본 여당의 현오봉(공화)·최영희(유정)총무는 송원영 신민당 총무에게 『장내반대는 참을 수 있으나 퇴장반대는 안된다』고 반대의 방법까지 「지정곡」을 주문했다.
이에 굴복한 신민당이 「참석반대」를 당론으로 결정하면서 박의장서리 등 여당간부들의 폭언·모욕·협박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지 신경식 공화당 사무총장 같은 이는 『사과를 원한다면 제일 맛있는 「후지」사과로 화끈하게 대접하겠다』고 응수했다.
소위「백파동」의 장본인인 백두진 의장은 회오리 속에서 선출된 후 『파동때문에 난처했겠다』는 기자들의 말에 『명경지수와 같다』고 시치미.
3월17일 본회의에서 행한 당선인사로 『45년간의 사회생활과 70년간 살아온 동안 난산한 아이는 발육도 잘 되고 가슴이나 키도 크더라는 것을 알았다』고 장담한 그가 1년도 자라지 못하고 그친 것은 하나의「아이러니」였다.

<신민, 잇단 당수후보 선언>
○…신민당 전당대회 (5월30일) 가 가까워지면서 당내 각 계파는 선전용·공격용「말」을 무더기로 만들어냈다.
이철승 전 대표는 마포에 새 당사를 지은 공로를 배경으로「안국동 시대」에서 새로운 「마포시대」를 주창했고 안보와 자유를 중도적으로 봉합하자는 특유의「중도통합론」을 계속 밀고 나갔다.
이씨의 중도론은 당내 각 계파로부터 공격을 받아 조윤형 부총재는 『중도통합론은 남의 화투판에 꺼어 들어 개평이나 뜯겠다는 이론』이라고 공격했다.
김영삼 총재는「민주회복」을 들고 나와 야당에 소위「선명바람」을 일으켰고 선명세력에 대한 외부의 탄압을 빗대어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고 했다.
전당대회에 앞서 김영삼·이철승·신도환·조윤형·이기택·박영록·김재광 의원 등이 연달아 당수후보를 선언하자 당내에서는 『언제 선언하십니까』라는 인사말이 유행어로 등장해「선언시대」(고흥문씨의 말)를 맞았다.
「카터」대통령 방한(6월29일)을 전후해「인권문제」라는 말이 자주 거론됐다.
신민당이 예춘호·한병채 의원 등 무소속의원 9명의 영입을 발표 (6월5일)하자 공화당 박준규 당 의장서리는 『미친년 널뛰듯 왔다갔다한다』고 비난한 뒤 며칠 못가 나머지 무소속의원 15명을 무더기로 몰아갔다. 박권흠 신민당 대변인은 『허둥지둥 만들어낸 어설픈 연극으로 띠나버린 관객을 다시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라며 신민당에 입당하려다가 공화당으로 돌아선 임호·변정일 의원에 대해『인간으로서 도저히 견딜수 없는 고통을 받은 모양』이라고 동정.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 외신기자구락부회견(6월11U일)에서 『김일성과 면담할 용의가 있다』『북한의 책임 있는 인사와 언제어디서나 만날 용의가 있다』고 제의한 데 대해 북괴노동당 김일 부주석이『긍정적인 제의』라고 받아들이자 여당에서는「공개해명」을 요구했고 여야대변인의 치열한 성명전 속에서 「공개질문」이라는 용어가 자주 튀어나왔다.

<도산가는곳에… 주장도
○…금년 정국에서 태풍의 눈은 YH사건.
여당이「동반자관계」(박준규)를 호소했지만「민주회복」이란「슬로건」아래 출범한 김영삼 총재는 7월부더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했다. 7월17일 김총재가 전주에서 『종교와 정치는 분리될 수 없다』는 발언을 하자 사흘 뒤 박정희 대통령이 『헌정질서 부정은 용납 못한다』고 되받았다.
양측의 이 같은 대치로 어떤 형태든 충돌이 예상되는 때 YH여공들이 시리를 먼저 얻었다.
8월11일 경찰이 신민당 사에 난입, 여공이 죽고 국회의원과 기자들이 구타를 당하자 소위「노사문제」의 불꽃이 튀었다.
경찰은 그들의 행위를「엔테베」작전이라 했고 정부·여당은『「도산」이 가는 곳에 도산이 있다』며 YH사태를 불순세력의 조종에 의한 것으로 몰고갔다.
그러면서 여당은 『신민당은 노사분규를 당리당략으로 이용했으니 국민 앞에 사과하라』 는 결의문을 채택하고 『김영삼 총재는 깡패』 (박준규) 라는 등 「매」의 얼굴로 분장했다.
○…금년도 정치를 희화한 말 중「가처분」만큼 적나라한 것도 없다. 제1야당의 당수가 일개 지법의 결정에 의해 권한이 정지되고 정당의 기능에 일대 혼란이 온 사건.
일반인의 상식으로는「설마」했던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직무집행정지 가처분신청이 조일환·유기심·윤완중 세 사람의 승리로 끝나자「가처분」이란 법률용어는 얼토당토않은 주장을 펴는 사람을 지칭하는 유행어가 됐다.
늦게 귀가하는 남편에겐 「남편권한정지 가처분」,꾸지람하는 부모는「아빠·엄마직무 정지 가처분」등등….
조윤형 신민당 부총재는『가처분은 전 최고위원들이 조종한 것』이라고 했고 김영삼 총재는『당내 소수 배반자와 중앙정보부의 합작극』이라고 했다.
가처분은 「대행」이란 기형아를 낳았다. 「신민당의 공중분해를 막기 위해」등장했다고 한 정운갑 총재 대행이 정치 일선에 「데뷔」하자 「매스컴」 은 『김「정지」, 정「대행」』이란 말로 정치현실을 풍자했다.
정대행이 자리를 못 잡고 표류하자 정부·여당으로부터 측면지원이 나왔다. 백두진 국회의장은 『앓는 아이도 자라는 법』이라고 했다.

<서명파동 몰고온「사대발언」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 국회에서 쫒겨난 「서명파동」의 직접적 발단은 「뉴욕·타임즈」지와의 회견내용.
김총재가 미국에 『직접적이고 공개적인 압력을 요구했다』해서 여당은 이를 「사대발언」으로 규정, 『죽기로하면 무슨 말을 못하나』(박준규), 『고별사로 간주한다』(오유방)는 등 노골적인 성토를 했다.
이런 와중에도 신민당 국회의원 중 김총재 지지서명자가 42명이란 닷를 차지하자 서명작전은 더욱 거세었다.
『이번만은 여당이 종이호랑이가 아니고 진돗개』라고한 정재호 유정회 대변인은 공화·유정 합동조정회의가 「8.5대1.5」로 김총재를 제명하자는 쪽으로 기울었다고 했다. 이런 가운데 신민당에선 적전 반란격으로 「분당론」까지 나왔다.
보이지 않는 손으로부터 『제명하라』는 압력을 받았던 여당의 목소리가 「옥타브」를 높이다가 드디어 10월4일 『변칙이 아니라 법칙』(백두진 의장)이라는 억지속에서 김총재는 제명을 당했다.

<선별수리 발언으로 여 궁지>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의원직 제명에 항의하여 제출한 야당의원들의 사직서 처리를 둘러싸고 「선별수리」란 말이 한 때 유행했다.
김총재 제명에 항의하여 10월13일 신민당소속 66명과 통일당 의원 3명 등 69명이 일괄 사표를 제출하자 여당에 의해 선별수리론이 나온 것.
공화·유정 합동조정회의에서「선별수리」가 거론됐고 신민당에선 정운갑 의원이 『여당의 선별수리가 우려된다』고 논평한 것이 최초.
황낙주 신민당 총무는『어린애 장난같은 웃기는 얘기』라고 일소에 붙였고 최형우 의원은『만약 내가 선별처리 대상에 포함되지 않을 경우에는 의원생활을 스스로 그만둘 것을 천주님께 맹세한다』고 기자들에게 공언했다.
「선별수리」라는 여당의 강경책이 구태회 정책위의장, 구범모 당무조정실장 등 간부들 입에서 서슴없이 튀어나왔는데「선별수리」론이 사회불안 요소가 됐다는 지적이 나오자 여당권에선 발설자를 색출하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1백80도 선회했다.
○…10.26사건 후 합동수사본부의 사건진상발표와 재판과정 등을 통해 김재규 등의 발언이 문자그대로 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膾炙) 했다.
『운전사가 출세를 하면 얼마나 합니까』(유성옥).「버러지 같은 놈」·「똑똑한 놈 3명」은 국민학교 학생들 사이에서까지 나돌았고 사건장소가 궁정동이었다하여「궁정동 만찬」이란 농담도 많았다.
○…「10·26」사건을 처음「유고」라해서「유고=박대통령 서거」로 통했고 최규하 총리가 대통령을 대리하면서「권한대행」이라는 말이 성행.
정운갑 신민당 총재 직무대행에서 시작된 「대행」은 그후 이희성 중앙정보부장서리·최황수 대통령 비서실장서리·민관식 국회의장 직무대리 등에 이르기까지 대행체제가 속출했다.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은 국장이 끝나자 시국에 관한 특별담화를 발표하고 각계 인사와 폭넓게「대화」했는데 『우리 나라가 안정속에서 헌정의 중단 없이 정치발전을 이룩해 나갈 수 있도록 초석이 되는 동시에 평화적이고 질서정연하게 정권이양을 이루고자하는 것이 나의 역사적 소명으로 인식하고있다』는 것이 최대행의 강조대목.
한편 박정희 총재의 뒤를 이어 공화당 총재에 취임한 김종필 총재는 『공화당이 이제는 집권당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여당에 불과하다』며『공화당도 야당이 될 수 있다는 각오를 해야한다』고 당원들에게 당부했다.
김총재는 김영삼 신민당 총재를 방문해 「평화적 정권교체 기틀」마련을 다짐했고 김신민당 총재는 최대행을 방문해「민주국민화해 협의회」를 결성하자고 제의했다.<정치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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