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이조후기의 산수화 기법은 일남종화에 큰영향끼쳤다|한국미술사학대회서 홍선표씨 밝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조선후기 (17∼18세기) 우리나라에서 성행했던 산수화의 수법이 일본남종화에 적지않은 영향을 끼쳤다는 연구가 나와 관심을 끌고 있다. 특히 일본남종화성행기의 4대가의 한사람인 「우라까미」 (포상옥당) (1745∼1820년)의 작품「운산중첩도」와 정선의 「정양사도」를 비교, 구도상으로 매우 횹사할 뿐 아니라 넓적한 붓으로 넓게 그은 「터치」가 양식적인 변화는 있지만 정선의 수법 (수직부)을 그대로 방불케 한다는 것이다.
이같은 견해는 홍선표씨(홍익대박물관)가 제1회 한국미술사학대회(8일·국립중앙박물관 강당)에서 발표한 「17, 18세기의 한일간 회화교섭」에서 제시, 「슬라이드」를 통한 비교에의해 확인되었다.
홍씨는 포상옥당과 한국산수화의 수법상 일치를 밝히는 몇가지 예로 포상의 그림이 ①구도에 있어 왼쪽에 미점을 써서 그린 토산을 배치하고 오른쪽의 보다 넓은 공간에 암산을 그려넣고 있는 점이 정선의 그림과 꼭같으며 ②그림 오른쪽의 「럭비」공을반으로 갈라놓은듯한 둥근 원추형모양의 암산은 1763년의 도일화원 김유성이 그린 「금강산도」의 암산과 흡사하다는 점 ③그림속에 나타난 붓의「터치」와 조금 짙은 먹으로 그어 내린 선은 정선의 수직준에 근거를 두고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당시 한일간의 회화교류가 통신사행원을 통해 빈번하게 이루어졌기 때문 이라는것이다.
1711년∼12년에 통신사행원접대역을 맡았던 일본남종화의 선구자 지원남해 (1676∼1751년)는 그의 『창해유해』를 통해 이기간에 문인화에 대한 흥미를 느꼈다고 토로, 사실상 그의 작품에서도 조선왕조회학의 영향을 엿볼수 있다고 말하며 또 일본초기의 남종화가 중산고양(1717∼1780년)도 조선후기의 회화와 관련 있음을 지적했다.
이시대 조선 통신사들이 문화전파역을 담당하게된 사실에 대해 홍씨는 명·청교체의 국제적혼란과 정묘호난이후 고조된 대외안보의식이 보다 적극적으르 대일관계에 있어 문학사절을 보낼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한다.
조선왕조는 유교문학의 전파로서 일본을 포악한 오랑캐의 습성으로 부터 교화시켜 무력적 침략을 피해보고자한 것이다. 그래서 5백여명의 대규모 파일사절단속에 시서화에 뛰어난 인사들이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었으며 특히 화원이나 사자관의 경우 『통문관지』등의 규정보다 더 많이 파견되는 사례가 보인다고.
이통신사행원들은 일본을 여행하면서 그곳 사람들의 극성스런 서화구청에 응하느라 많은 회화들을 일본땅에 남겼다.
이러한 추세에서 김명국과 한시각같은 도일화원은 당시 일본에서 풍미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한정되었던 선종화를 그곳사람들의 요청에 따라 그려주었던 것으로 홍씨는 추측한다.
이들은 이처럼 회화행적을 일본땅에 남겼을 뿐 아니라 그곳에서 초상화를 그려받거나 일본회화를 공적 혹은 사적인 선물로 받아와 이같은 관계를 통해 일본회화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혔을 것이라고 홍씨는 풀이했다.
덧붙여 그는 한국회화사의 큰줄기를 이해하는데는 중국회화와의 교섭문제 못지 않게 일본회화와의 관계가 밝혀져야만 할 것이라는 문제의식을 제기하고 아울러 일본땅에 전해져 유존하는우리회화를 연구하는것도 한국회화사연구에 보탬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방인철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