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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대통령에 바란다|우리서로한번 믿어보자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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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최규하대통령이 당선됨으로써 한국은 바야흐로 새로운 시기에 돌입된다. 차제에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몇 가지 소회를 밝혀두는 것이 도리 일 줄로 생각한다.
우선 국가적 차원에서 본다면 정부와 국회는 1대1로 마주 서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최대통령은 어느 정당의 배경이나 지지로 당선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에게는 따로 여당이나 야당이 있을 수 없다고 본다.

<어느 정당에도 편들지말라>
이제와서 과거의 대통령을 지지했다고 해서 여당이 될 수 없고 과거의 야당 이라고 해서 지금도 야당이될 수도 없다.
지금의 국회안의 정당은 과거와 같은 정당이라는 관념을 갖기에 앞서 대한민국 국회의원이란 명분으로 삼권분립의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해서 정확히 그리고 성실성 있게 행정부의 시비를 가려야할 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어느 정당만을 여당으로 여긴다면 그것은 안정과 평화속에서 정권을 공정히 이양하겠다는 생각과 모순되는 일이라고 하겠다. 또 어느 정당이 여당이라고 자처한다면 그것은 차기대통령을 자기 정당으로 넘겨주기를 바라는 소치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오늘날 과도기적인 시기의 정당은 여야 가릴것 없이 행경부의 독주를 견제하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서로 협조해 나가야 될 것이다.
다음은 앞으로 한국이 자유민주주의에로 향방을 잡았다고 하니 정말 그렇다면 국회의원이나 행정부 사람들, 기타 공무원은 지금까지의 사고방법을 1백80도로 전환시켜야 할 것이다.
앞으로 누가 국무총리가 되고 장·차관이 될지 알 수 없는 일이나 한가지 명확한 것은 자유민주주의의 관념이 철저하고 이를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용기와 결단력이 있는 사람이라야 행정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과거의 과오를 두 번 되풀이하지 않을 사람이나 또한 깨끗하고 참신한 사람이나 분간할 필요는 없다. 단 여하한 경우에 있어서든지 일관된 뜻을 못가진, 말하자면 지조를 팔아 먹던 사람은 배제되어야하고 심할 경우에는 명가나 노소를 막론하고 공직 또는 이에 유사한 직책에 나아갈 권리를 박탈해야 한다.

<경제사범없는 밝은 사회를>
다음은 경제사범이 정치적 부정·부패에 못지앉은 해악을 국민에게 끼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만 여태껏 용기와 결단력과 정의감이 부족하여 사정에 얽혀 올바른 척결을 못해왔다. 좀 지나친 이야기일지 모르나「나치스」시대의「히를러」는 전시경기를타고 폭리를 본사람 3인(내기억으로)을 처형했었다. 그 뒤로 경제사범이 없어졌다는 이야기다. 올바른 정치는 역사적 고사를 항상 기억하고 오늘을 반성하는데서만 기대된다.

<모든 불상사는 불신에서>
지금 우리의 당면한 문제는 언론의 자유문제다. 지금까지 우리는 휴전선 안보문제라는 이유하에서 언론의 자유가 보류되어 왔다. 그리하여 우리는 국사에 대해서 알아야될 많은 것을 몰랐고 또 좋은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오늘의 불신풍조다. 이런 풍조 속에서 사람들의 점신생활이 혼란에 빠지고 급기야는 사회적 혼란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는 사회를 파국으로 몰아 넣게 되는 것 뿐이다.
언론의 자유에는 다소나마 혼란이 따르게 마련이다. 더구나 교양과 자제력이 약한 우리 사회에서 말이다. 그러나 한가지 명확한 사실은 언론의 혼란속에서 올바른 사상을 찾아낼 수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남대문이나, 동대문시장에 가보면 수많은 종류의 상품과 또 그 상품을 선전하는 소리에 귀가 아프고 눈이 핑핑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자기가 필요로하는 가강 좋은 물건을 골라산다. 마찬가지로 언론의 자유는 사상의 자유시장 이다. 이런 시장이 없으면 사람들은 진리의 사상을 찾을 수가 없다.
진리의 사상이 없으면 기둥이 없는 집과 같아서 사람들의 사회생활은 혼난과 불안과 불평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무릇 혼돈 속에서 자각적인 정돈이 생기고 불안 속에서 안정이 나타나며 불평을 토한 뒤에 만족이 오는 법이다. 더구나 자유민주주의는 언론의 자유에서 얻어 짐에 있어서랴.
차제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제의해 본다. 언론자유에 있어서 국민이나 언론인들은 모두 자중·자제할 것이고 정부는 국민과 언론인을 용기 있게 한번 믿어 보라는 것이다. 다음파 같은 고사를 되새겨 보자.
1차대전전까지 영국의 부녀참정권운동은 치열했다. 이에 반대하는 대신들 집에 투석·방화를 하는가 하면 반대연설을 하는 장소에는 박수부대를 보내 연설을 방해하고 심지어는 연단앞으로 의자「미사일」을날리기도 했었다. 그런데 대전이 나자 이들 부녀들은 일체의 시위를 거두고 모두다 군수공장에 가서 군복을 만들고 대포알을 깎았으며 취사장에서 밥도 지었다.
「처칠」경의 부인도 군인식당에서 취사일을 맡아보았던 것이다. 4년후전쟁이 끝나자 영국 징치인들은, 이만 했으면 부녀에게 참정권을 부여해도 좋다고 판단하고 19l9년에 참정권법안을 통과 시켰다. 모든 불상사는 불신사회에서 생겨난다. 한번 서로 믿고 사는 사회를 이룩해 보자는 것이다. 여기는 선후가 없다.
앞으로 국가나 사회의 지도자는 도덕적 과오가 없는 사람이라야 되겠다. 왜냐하면 몸과 마음이 순수하여야 바른 정치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도덕적이라고 하는 것을 주로 성도덕과 사상도덕에 국한시키고자 한다. 우리나라의 통념으로는 정치인이 외도깨나 한다고 나무랄것 없고 도리어 못하는 자를 졸장부라고 생각한다. 성도덕이 문란한 사람치고 바른 말, 바른 행위를 하는 사람이 없다.
외도하겠거든 고관의 자리에서 물러나라. 그러면 그 사람의 외도는 개인문제다. 그러나 높은 자리에서 외도를 능사로 한다는 것은 국민에게 부끄러움을 주는 해악이요, 존경은커녕 멸시를 받게되는 일이다. 지금우리 사회에서 존경받는 지도자가 몇 사람이나 있을까.
사상도덕이라 함은 지조를 팔아먹는 것을 뜻한다 (일정한 정치적 이념이 없이). 오늘은 이 정당에, 내일은 저 정당으로 전전하면서 아부와허세를 부리는 경우다. 사실 우리나라의 정치풍토가 제대로 되지 못하고 있는것은 지조를 바꾸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누가 무슨생각을 가지고있는지 알 수 없는데 있다.

<변화에 도전하면 결과비참>
정치인만이 아니라 앞서 말한바와같이 언론인·학자 모두가 일관된 지조를 지켜야 된다. 도덕적 과오가 없는 정치풍토라야 그 나라의 교양과문화수준이 높아 질 수 있다.
끝으로 누구나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은 『역사는 변한다』는 진리다. 모든 진리는 변하는 날이있어도 『역사는 영원히 변한다』고하는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 사람의 일생도 유년·소년·장년·노년으로변해가는데 한세기·시대, 또는 세대가 변하지 않겠는가?
이 변화의 철칙에 도전한다는 것은 무모한 짓이다. 자유·민족주의의 역사적 변화에 도전한 「나폴레옹」의 말로는 비참했다. 자유민주주의와 국제평화주의란 20세기의 변화에 도전한「히틀러」「뭇솔리니」그리고 「도오죠」(동조)의 최후도 열마나 참담했나? 변화를 요구하는 역사에 도전하는 지도자가 있다면 그 참화는 전국민에게 파급된다. <필자=경희대특별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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