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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화 10대대통령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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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요즘 점점 숙명론자가 되어가는 느낌이다. 세상일이란 인력으로 어떻게 할수없는데가 있는 것 같아』-. 「10·26」사태직후 대통령권한대행으로서 시국수습의 책임을 맡아 10代대통령으로 나서지 않을수 없게 됐을 때 최규하대통령이 측근들에게 토로한 말이다.
관계에 발을 들여놓은후 20여년간의 외교관생활, 정치적 배경이 없는 행정가총리로 4년을 지내다 나라의 정상에 오르게된 상황을 두고 그는「숙명」이란 표현을 썼다.
스스로 대통령재목도 아니고 그만한 경륜도 없다고 말해온 최대통령은『정권의 평화적 이양의 기록을 남기겠다』는 심정으로 대통령에 나섰다고 측근들은 전한다.
최대통령은 3·1운동이 전국으로 터지던 1919년7월16일 강원도원주읍봉산2동 속칭 삼광마을에서 최양오씨의 8남매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부 최재민씨는 성균관박사를 지내 마을사람들은「최박사집안」이라고 불렀다. 읍장을 지낸 부친 최양오씨는 딸 둘(경하·정희)을 낳은뒤 아들을 갖지못해 부인李씨가 치악산에 치성을 드리는 정성 끝에 15년만에 얻은 첫아들이 최대통령이었다.
6살에 원주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한 그의 성적은 늘 우등이었고 졸업할 때는 죽반 45명중에서 첫째였다.
특히 글짓기에 재주가 많았던 그의「뱀과 개구리」라는 글은 뱀이 약한 개구리를 어르다가 끝내 잡아먹는다는 내용으로 일본의 식민지가 된 우리처지를 비유해 담임이었던「쓰찌야·가즈오」(토곡일부)도 놀랐다는 일화가 있다.
보통학교즐업후 서울에 있던 재종형 최봉하씨의 도움으로 경성제일고보에 진학했다.
당시 성적에 따라 임명됐던 급장을 지냈지만 늘 과묵했고 성적은 2백명중 20등이내에 들었다. 졸업후 성대(현재 서울大)예과와 동경고등사범학교 두학교에 모두 합격한 그는 훌륭한교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살리기 위해 고사를 택했다.
동경시절 그는 가끔 선술집에 가서 친구들과 술을 마셨고 술값이 없어 시계를 맡기기도 했다. 승마부에 들어가 말을 탔고 수영을 좋아해 5「마일」, 10「마일」원영도 곧잘 했다.
43년 8주「코스」의 만주국관리양성소인 대동학원을 나와 잠시 관리생활을 했던 그는 해방과 더불어 서울로 돌아와 서울대사대에서 영문학을 3개윌간 가르쳤다.
그는 46년 중앙식량행정처기획과장으로 오랜 관료생활을 시작해 6·25동란 당시 농림부양정과장을 지냈다.
그를 잘 아는 주변사람들의 천거로 변영태외무장관이 외무부통상국장으로 끌었고 당시 김용식주일대표부공사가 변장관에게 졸라 주일대표부 총영사로 기용해 외교관 시작과 함께 7년간 한일국교정상화 교섭에 실무자로 참여했다.
그의 관리생활중 유일한 파란이 일어난 것은 4·19직후. 외무차관직에서 물러난 그는 을지로에서 변호사를 하던 친구를 찾아 다닐때 늘「버스」나 전차를 탈 정도로 여유가 없었다.
「말레이지아」대사 를 지낼 때는 대사관 담너머에 있는「골프」장에 한번 안가고 일에만 몰두했다.
외무장관시절 일요일에「골프」장에 나갔던 국장들이 공관에서 전화로 「체크」하는 장관에게 불려 외무부로 들어와 근무하는 일은 비일비재였다.
이때 그의 부훈은「헌신부난」. 몸을 바쳐 어려움에 부딪친다는 뜻이다.
이것이 공인으로서 일관된 그의 철학이기도 하다.
그의 뚝심은 외교가에서 정평이 나있다. 68년 1·21사태후 국군장비 현대화문제로 「타워·호텔」에서「밴스」미특사와 철야로 공동성명작성회담을 밀어붙였다. 결국 그는 미국의 안보공약재천명, 한미연례국방장관회담, 한국군현대화 같은 성과를 거뒀다.「밴스」는 귀국후「타임」지에『잠을 못자도록 밀어붙이는 바람에 두손 들었다』고 실토했다.
「큰곰」이라는 별명을 듣지만 임기응변에도 능하다. 우리측 수석대표로「유엔」에 참석했을 때의 일. 북괴대표가 느닷없이 도발적인 발언을 했다.
뒤이어 등단한 그는 품속에서「메모」지 1장을 꺼내 연단위에 놓고 휴전선에서의 북괴의도발실례, 간첩남파사실등을 들어 반격했다. 나중에 보니 그 메모지는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백지였다. 그는『그냥 말하면 증거가 없다고 할까봐 「메모」지를 내놓은 것』이라고 해서 주위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73년 석유파동때 대통령특사로「사우디아라비아」에 파견되어 듣는등 마는등 하는「파이잘」王 앞에서 우리입장을 끈질기게 설명해 마침내 그 열의로「마이잘」왕을 설득 했다고 한다.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넌다』 는 식으로 확인하고 또 확인한다. 총리시절 거의 일요일마다 서울시내와 주변을 시찰다니다가 『여기가 어디냐』고 반복해 묻기 때문에 매번 수행하는 총리행정조정실장이 자기 차속에 서울시내 지도를 붙여 두고 출퇴근 때마다 동명을 외워야했다.
1m78의 거구에 타고난 건강을 지닌 그는 외무장관·특별보좌관·총리로 재임하던 13년간을 결근한번 하지 않았다.
공직에만 몰두하는 때문인지 그와 터놓고 지내는 친구를 찾기가 힘들다.
경기고동창회에서 초대했을 때도 『총리가 동문이라고 참석하면 교육계에 좋지않은 영향을 줄것이 아니냐』고 거절한 적이 있다.
부인 홍기여사 (충주출신)와는 고보시절 집안에서 정혼해 결혼했다. 밖으로 나서기를 싫어하는 홍여사는 요리 솜씨가 남다르다는 평을 듣는다. .
가족으로는 공관에 함께 살고있는 장남 윤홍(34·대한무역진홍공사) 미국에 연수가 있는종석(28·외환은행) 두아들과 외교관에게 시집간 딸 종혜(26)씨등 2남1녀가 있다.
최대통령이 총리로 임명됐을 때 『정부의 방침은 대통령이 정하고 우리는 그것을 충실히 실천해야한다』고 말한바 있다. 이제 그 자신이 결정을 내릴 대통령이 되었다. 과격함을 싫어하고 중용을 취하는 신중한 그가 과정의 수반으로서 민주발전을 향한 탄탄한 돌다리를 만들어 놓을 것이라는게 국민들의 기대다.<김영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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