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영교수를 애도하며…황성모<충남대교수·사회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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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이해영교수 영전에
이 어찌된 일이오.
『우리 모두 어지간히 늙었구나. 하하』하고 헤어진 것이 얼마전의 일이었지만 이교수나 나나 가까운 장래에 세상을 떠날 것이라는 생각이야 티끌만큼이라도 했었겠소. 어쩌면 그 웃음은 삶에 대한 자신감을 표했던 것인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이 어찌된 영문이오. 생자필별이라하여 이것을 받아들이기에는 이형은 아직도 너무나 할 일이 많지 않소.
우리가 1944년 초 봄 청량리 예과자리에서 처음으로 인연을 맺은 후 어언간 35년이 지났구료. 그 당시 일제의 마지막 발악시대에서부터 오늘날까지 민족상잔전쟁를 포함한 말할 수 없는 격변기를 우리는 같은 곳에서, 혹은 다른 곳에서 겪어 왔지만 오로지 한가지 일에서는 우리의 관심은 언제나 공통된 것이였지요. 사회학을 연구한다는 그 의롭고도 힘든 일 말이오. 6·25때 폐허로 화한 서울에 돌아온 후 얼마되지 않아 「록펠러」재단의 초청으로 이형이「펜실베이니아」대학에 다녀온 것이 해방 후 우리의 사회학과 미국사회학과의 교류의 시작이었다고 생각되오만 이 때부터 한국사회학의 시야는 세계에로 뻗어갔던 것이 아니었소.
서울대문리대안에 인구문제연구소를 개설하여 많은 젊은 학자들을 배출하는데 어버이와 같은 역할을 한 것도 형이었고 서울대문리대학장으로서, 또 서울대교무처장으로서 그 어려웠던 시기들을 스승으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고 일을 치러낸 것도 형이 아니었소. 이제 형은 우리들 곁을 멀리 떠났다 하더라도 이 사실만큼은 서울대학교의 역사와 더불어 오래도록 남을 것으로 믿으오.
타고난 고결한 인격의 소유자였던 형이 이 혼탁한 세상을 살아오기에 괴로왔을 때도 많았겠지요. 그러나 형은 진실로 깨끗한 학자의 삶을 사셨소. 한 번도 굽힘없이 학문인의 자세를 우리에게 보여주었소. 분명 이것은 우리의 자랑이오.
형이여! 어차피 멀지 않아 저 세상에서 다시 만날 것이 천리인즉 그 때까지 편히 주무소서. 형이 사회학계에 뿌려놓은 씨앗들은 만대에 꽃피어날 것으로 믿어 마지않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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