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송홍선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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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광주시내에는 67년11윌3일에 세워진 흉상 하나가 있다. 주인공의 이름은 송홍.
그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지금으로부터 꼭 50년전에 그는 광주고보에서 한문을 가르치던 훈장이었다.
그는 교장의 눈촛총을 받아가면서도 늘 한복을 입고 다녔다. 한문시간에도 틈틈이 한국역사를 가르쳤다.
그러던 그는 이른바「광주학생사건」으로 자기가 가르치던 학생들이 무더기로 잡혀 다음해 2월 공판을 받던 다음날로 표연히 교단을 떠나고 말았다. 주지하는 바와같이「광주학생사건」의 주동은 광주고보(오늘의 광주서중과 일고)의 학생들이었다.
통학열차속에서 광주고보학생들과 일본학생들 사이에 시비가 붙은게 발단이 되어 거국적인 학생독립운동으로 번져 나갔던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그당시 일인학생들이 한국인을 가리켜 야만인이라는 욕을 하지않았고, 또 했다하더라도 그걸 듣지못했었다면 사건은 터지지 않았을까.
그렇지는 않다. 역사에는 본래 우연이란 없는 것이다. 모든게「필연」에서 일어난다. 우연은 그저「필연」을 재촉하는데 도움이 될 뿐이다.
『만약에「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얕았어도 세계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이렇게 「파스칼」은 말한적이 있다. 그러나 「시저」가,「클레오파트라」를 만나지 앉았다 해도 역사는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파스칼」은 역사적사건이란 그저 겉으론 단순하게 보이는것도 눈에 보이지 않는 깊은 뜻을 간직하고 있다고 말하려했을 뿐이다.
열차안에서의 시비가 없었다 해도 그당시 학생들의 독립운동은 전국에 퍼지게 마련이었다. 이렇게 우리는 광주학생운동을 봐야한다.『한일합병이래 18년, 우리민족은 일제의 마제하에 극도로 유린되고 가혹한 경제적 착취와 악독한 정치적 포압을 당해왔으며, 그들은 이를 은폐하고 미장하기위해 문화적 기만을 농하고 있다…』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기 1년전에 광주고보생들은 이미 이런선언문을 내면서 맹휴에 들어간 적이 있다.
이때의 그들은 모두 17세에서 20세사이의 청소년이었다. 이들에 동조한 여자고보생들은 그보다도 한두살 더 아래였다.
당시의 광주고보생들은 수학여행으로 주로 만주에 갔었다. 거기서 그들은 이주한 동포들의 비참한 생활을 목격하기도 했다.
그것이 그들을 눈뜨게 만드는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뭣보다도 그들을 일깨워주는 송홍선생과 같은 거룩한 스승이 있었다.
그 당시만해도 그런 정압적인 기둥이 전국에는 적지않았다.
광주학생운동을 전후하여 특히 1925년께부터 전국적으로 맹휴가 50건 이상씩 있었다.
그것도 조금도 우발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만한 기운이 무르익어가기까지에는 수많은 송홍선생들이 전국의 여기저기에 있었기때문이다.
…<금조설여제군별…무부강호노병인> 이런시를 남기며 송선생은 교단을 떠났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우리곁에 살아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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