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을 아름답게 가꾸면 곱고 깨끗한 마음은 저절로"|533돌 「한글날」을 맞아-남 기 심<연세대교수·국어학>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곱게만 가꾸어 쓴다면 우리나라 말처럼 아름다운 말이 세상에 또 있으랴! 물론 제 나라말을 나쁘다고 할 사람은 세상에 없겠지마는 우리에게는 우리나라 말이 가장 아름답고 무엇보다도 소중한 재산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우리말을 가꾸어 곱게 쓰려고 들 하지를 않는다.
최근에 시내 어느 대학신문이 다음과 같은 지적을 한 것이 있다.
즉 『어디까지나 한일 기계류 무역확대 속에서 심한 역조를 개선하려는 발상인 것 같다』는 어떤 일간지 사설중의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어디까지나, 한국이 일본과 기계류를 폭넓게 무역하면서 겪는 심한 손해를 줄여보겠다는 생각인 것 같다』와 같이 썼다면 표현이 훨씬 부드러웠을 텐데 굳이 딱딱한 한자어에 토만 다는 식의 글을 써서 표현을 꺽꺽하게 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개학기로부터 언문일치운동·우리말 쓰기 운동을 벌여온 지가 벌써 팔, 구십년이 되어 가는데 아직도 생소한 한문 투의 문장을, 그것도 대중을 상대로 하는 신문에서 굳이 고집하는 까닭을 참말로 알 수가 없다. 뿐만 아니다.
『이날 마지막 단식「게임」에서 전 선수는 「파키스탄」의 「에이스」「사이드·미어」선수를 침착한「플레이」, 좋은 「서브·리시브」와 「패싱」으로 1시간 40분만에 3「게임」을 「스트레이트」로 완파하였다.』이 글 역시 신문기사에서 따온 것인데, 이것을 과연 우리말 문장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서양외래어는 일상대화에서 더 심하게 남용된다. 『미스 김은 참 차밍하고 샤이하지』, 『그 친구 프라이드가 너무 세어서 안 돼. 이런 케이스에는 프라이드만 가지고 되지 않거든』하는 따위가 그것이다.
국어 순화의 필요성은 비단 생소한 한자말이나 서양 외래어의 분별 없는 사용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새끼야, 거기서 인상쓰지 말고 어서 꺼져』하는 험악한 말씨나 욕설, 요즈음 대학생사이에서 흔히 쓰이는 『이빨 깐다(말 잘한다), 으악 이다(파트너가 못생겼다), 일회용 반창고(한번만의 파트너), 후지다(뒤떨어진다), 죽여준다…』 따위의 품위 없고 야비한 말들, 『선생님 내가 한턱 쓰겠어요』『너 선생님이 오시랜다』『과장님실』같이 문법적으로 잘못된 말들이 모두 순화돼야 할 대상이다.
국어의 순화를 위해서는 밖으로부터 분별 없이 들여오는 외래요소를 걸러내어 순수하게 만드는 일과, 안으로 우리말을 아름답게 다듬고 가꾸는 일 두 가지가 다 필요하다.
말이란 것은 우리 정신생활·사회생활의 소산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반대로 우리의 정신생활을 지배하기도 한다. 험악하고 야비한 말씨는 우리의 정신생활이 황폐해진 증거이기도 하지만 그러한 말씨를 쓰고 듣는 가운데 이러한 황폐한 정신적 자세는 다른 사람에게 전염되고 우리 마음을 더욱 거칠게 만든다.
북한에서 쓰이는 도전적인 거친 말씨들이 그 사회를 호전적이고 투쟁적인 상태로 잡아두고 있는 것과 같다.
학교에서 고운 시를 읽히고 훌륭한 문장들을 읽히는 것은 학생들의 마음을 곱고 깨끗하게 가꾸자는 것이요, 그들의 정신생활을 여유 있고, 풍요롭게 하자는 데 그 뜻이 있는 것이다. 『새끼, 짜식, 쿠리다…』 같이 된소리·거센소리가 근래에 와서 부쩍 늘어나는 것은 우리 생활이 자꾸 짜증스러워진다는 것을 말하고, 공대말이 점점 없어지거나 존대말을 잘못 쓰는 것은 남을 인격적으로 대하고, 서로 공경하는 풍조가 없어지는 것으로서 우리사회가 산업사회화되면서 차차 비인간화되어 가는 것을 단적으로 나타내 주는 것인지 모른다.
그렇지만 이렇게 험하고 거친 말씨, 품위 없고 저속한 말투를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다. 말을 곱고 아름답게 가꾸려는 노력은, 마음씨를 부드럽고, 아름답게 가지려는 노력과 통하는 것이요, 나아가서 사회를 정화시키고자 하는 노력과도 통하는 것이 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외래어까지 버려서는 안되겠지만 살아있는 우리말을 밀어내는 외래어의 남용을 반성하는 것은 제 것을 아끼고, 제 것을 가짐으로써 남의 문화의 아류가 되어 가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게 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음운·어휘·문법, 그리고 의미의 여러 면에서 정기적으로 우리 말씨가 거칠어지고 잘못되어 가는 것을 바로잡고, 홍보활동을 통해서 이를 널리 펴는 국가기관이 꼭 있어야 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