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탄신 백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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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북국의 봄은 아직 춥고 음산했다. 한방에 둘러 앉은 12명의 청년은 그러나 불길에 타고 있는 것 같았다. 서로의 매박소리라도 들릴 듯이 가슴이 두근거렸다.
『우리는 이 자리에서 하늘에 맹세합시다.』
어느새 누가 준비했는지 칼이 번쩍했다. 한 청년의 왼손 무명지가 떨어졌다. 그는 서슴없이 태극기를 펼쳐놓고 피 하르는 손가락으로 『대한독립』이라는 네 글자를 썼다. 안중근청년이었다.
1909년3월2일 「러시아」영연추부근의 가리, 안중근의 거처에 있었던 단지혈맹이었다.
『두고 보시오! 3년안에 나는 이등박문으 죽이고 말겠소.』
이등은 우리 나라를 일본의 허수아비로 만든 을사조약을 강요했으며, 끝내는 한국통감에 취임, 한일합방의 기초를 마련했던 침략의 원흉.
때는 의외로 빨리 다가왔다. 단지의 서약을 했던 그해 10월 이등은 다시 대륙침략의 길을 트려고 만주 「하르빈」에 도착했다.
10월26일 아침9시30분. 「하르빈」역두를 울린 안중근의 육혈포소리는 드디어 이등을 쓰러뜨렸다.
안중근의 애국충정은 거쟁, 그 하나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는 비로 31세의 젊은 나이로 형장의 이슬이 되었지만, 그 생애의 전부에 하나의 빈틈도 없이 모두를 조국에 바쳤다.
1879년9월2일 해주광석동에서 진사의 아들로 태어나 17세 소년시절에 「프랑스」 신부의 권유로 천주교에 입교했다.
조국의 앞날은 날로 어둡기만해졌다. 이때 민족선각자들의 깨우침을 받아 그는 육영사업·산업진흥·항일투쟁을 생애의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을사조약이 있고나서 실국의 분한을 참지 못해 그는 망명의 도정에 올랐다. 독립군을 이끌고 두만강건너 경전에서 일군을 무찌른 무공도 세웠다.
「거사」후 법정에 서서는 자신을 변호하기보다 조국을 변호하고 일제의 무도한 침략에 항변했다.
그 의연한 자세와 기개는 바로 우리민족의 표상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아직 그의 뼈는 이역 「하르빈」에 묻혀있다. 망국민들의 계일이 되겠다는 그의 유언에 따른 것이다. 국권이 회복되고나서야 고국에 반장해줄 것을 원했었다.『…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유언의 종절.
탄신 1백주년을 맞는 오늘(9월2일) 그는 천국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유해마저 가까이 모시고 있지못한 우리는 새삼 부끄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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