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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속으로] '우리 시대 자화상' 편의점 24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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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처음 온 알바인가 보네~.”

 손님 말투는 퉁명스러웠다. 겨우 비타민 음료 두 병을 계산하느라 쩔쩔매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문제는 1+1 행사였다. 1+1 행사를 하는 비타민 음료 중 한 병을 바코드로 찍으니 1100원이 찍혔다. 나머지 한 병을 또 찍으니 합쳐서 2200원이 찍혔다. ‘어? 1+1 행사 상품이니까 1100원만 찍혀야 하는데, 뭐가 잘못된 거지?’ 당황하는 기자에게 옆에 있던 종업원이 “소계를 눌러야죠”라고 말했다. 짜증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던 손님은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라는 기자의 인사를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편의점을 나갔다.

 월드컵 한국과 벨기에전이 열리기 전날인 지난달 26일 저녁. 기자는 서울 청계광장에 있는 편의점 세븐일레븐에서 아르바이트(알바)를 했다. 이곳 점주 안재춘(57)씨는 27일 새벽 벨기에전 응원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편의점으로 몰려들 것이란 생각에 알바 2명을 추가로 배치했다. 기자는 이날 추가 배치된 알바 중 한 명이었다. 처음 접한 편의점 일에 기자는 실수 연발이었다.

 저녁 9시30분쯤 과자와 음료수, 맥주를 가득 실은 트럭이 왔다. 내 키만 한 높이로 쌓인 짐을 수레에 싣고 세 번에 걸쳐 창고로 실어날랐다. 트럭 기사는 “오늘 처음 왔어요? 점장이 안 갈궈요?”라며 눈을 찡긋했다.

 자정이 가까워지는 시간, 나이 지긋한 점원이 전날 팔다 남은 바나나를 나눠줬다. “시간 있을 때 먹어둬야 해. 오늘은 바나나 상태가 좋네”라고 말했다. 유통기한이 지나 팔 수 없는 편의점 음식들은 폐기하거나 알바들이 먹는다.

 조금 후 응원에 나선 대학생 무리 10여 명이 우르르 편의점 안으로 들어섰다. 맥주·소주·과자 진열대가 순식간에 텅 비었다. 우리는 신속하게 빈 자리를 채웠다. 상표를 잘 보이게 하고 유통기간이 얼마 안 남은 상품을 앞쪽에 뒀다. 경기는 1 대 0으로 졌다. 그래선지 편의점을 찾는 사람도 예상보다 적었다. 점장은 “매출이 별로 늘지 않았다”며 한숨을 쉬었다.

 편의점 알바는 10대나 20대들이 하는 거라는 선입견과 달리 이곳의 알바는 40~50대가 대부분이었다. 홍모(54·여)씨는 남편이 사업에 실패하면서 이 일을 시작하게 됐다고 했다. “계속 서 있어야 하고, 제대로 밥을 못 먹고, 손님들에게 항상 친절해야 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에요”라면서 “그래도 이 나이에 이렇게 일하게 된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죠”라며 웃었다.

 점주 안씨는 원래 조흥은행 여의도지점장이었다. 외환위기 때 퇴사한 후 편의점을 시작했다. “관리비·인건비 빼면 남는 게 없어요. 여름엔 괜찮은데 겨울엔 적자예요. 알바생들은 며칠 일하고는 못하겠다고 나가버리죠. 은행에 있을 땐 직원 70~80명도 관리했는데 편의점에서 4~5명 관리하는 게 훨씬 더 힘들어요.”

사진 위쪽부터 가수 싸이의 뮤직비디오 ‘행오버’의 한 장면, 편의점에서 휴대전화를 개통할 수 있는 알뜰폰 상품이 최근 나왔다. 2007년 국토 최남단인 마라도에 문을 연 GS25 편의점. [중앙포토]

 편의점이 국내에 첫선을 보인 지 25년, 편의점 수는 2만4000개를 넘어섰다. 인구 2000명당 한 개꼴이다. 마라도·백령도에도 있다. 인구 대비 편의점 밀도 면에서 세계 최고 수준이다. 편의점이 처음 생겨난 미국이나, 편의점 문화가 먼저 발달했다는 일본·대만보다도 높다.

 1989년 처음 편의점이 등장했을 땐 많이 낯설었다. 그 전엔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가게는 찾기 힘들었다. 게다가 그 밝고 깨끗하고 탁 트인 매장은 동네 구멍가게가 감히 넘볼 수 없는 수준이었다. 활기찬 10~20대 점원들은 손님을 친절하게 맞았다. 대부분 외지 아르바이트생이었던 그들은 자주 바뀌었고, 지역 손님들을 기억하지 못했다.

 “옛날 구멍가게들은 주인 아주머니나 아저씨랑 얼굴을 트면 서로 어떻게 사는지도 훤히 알고, 가끔 외상도 하고 했죠. 하지만 편의점은 안 그렇더군요. 익명화되는 도시생활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곳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최근 편의점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 ‘이것이 우리의 끝이다’의 김경묵(29) 감독의 말이다. 지방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서울 생활을 시작한 그는 자취생활 11년간 하루 한두 번씩 편의점에 들렀다. 처음엔 삼각김밥이나 우유 등 음식을 사먹기 위해서였지만 나중엔 ATM 기기에서 돈도 찾고, 공과금도 내고, 택배도 보내고, 세탁물도 맡기는 공간이 됐다. 잠자는 걸 빼면 편의점에서 해결할 수 없는 게 없었다. 그가 이번에 편의점에 대한 영화를 찍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이제 편의점은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그대로 축약한 공간이 됐어요. 이 공간에 대한 이야기만으로도 우리의 삶을 보여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영화뿐 아니라 편의점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는 문화 콘텐트의 소재로 자주 등장하고 있다. 최근 가수 싸이의 뮤직비디오 ‘행오버’에는 편의점에서 컵라면과 숙취해소제를 들이켜는 싸이와 스눕독의 모습이 등장해 웃음을 자아냈다. 작가 본인의 편의점 알바 경험을 담은 웹툰 ‘와라! 편의점’은 10~20대의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모바일 게임과 캐릭터 상품으로도 개발됐다.

 편의점 알바를 하면서 찍은 댄스 동영상을 올린 이승재(17·순천공고3)군은 편의점을 자주 이용하는 10대 청소년들 사이에서 인기다. 학원이나 학교 근처에는 으레 편의점이 있게 마련이고 주머니가 가벼운 청소년들에게 편의점은 값싼 음식을 파는 식당이자 만남의 장소로 애용된다. 그의 별명은 ‘미키마우스탈알바’. 미키마우스탈알바라는 별명은 지난해 화장품 가게 앞에서 미키마우스 탈을 쓰고 춤을 추는 알바를 하는 동영상이 화제가 되면서 붙여졌다. 이군의 꿈은 “연예인이 되는 것”이다.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편의점 알바를 하고 있는 그에게 편의점은 생활을 지탱해 주는 수단이며 동시에 꿈의 공장이다. 그는 “벌써 꽤 많은 사람이 알아봐 주고요, 팬클럽도 생겼어요. 이렇게 조금씩 유명해지면 언젠가는 제 꿈을 이룰 수 있지 않을까요”라고 말했다.

 편의점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도 시도되고 있다. 서울대 전상인 교수는 올해 초 펴낸 책 『편의점 사회학』에서 “편의점을 제 집처럼 드나드는 일이 흔해졌고, 편의점을 거쳐 등교하고 편의점을 거쳐 퇴근하는 일상도 이젠 낯설지 않다. 편의점을 보면 세상을 읽고 세상에 대해 말할 수 있다는 점에서 편의점은 한국 사회를 설명할 수 있는 창구 가운데 하나”라고 설명했다.

 “들어오는 모습만 보고도 뭘 사려는 손님인지 알 수 있어요. 매장을 둘러보지 않고 바로 계산대로 오는 손님은 십중팔구 담배 사러 오는 손님이에요. 담배 손님들은 대응하기가 힘들어요. 모든 담배의 이름과 위치를 외우고 있지 않으면 안 돼요. 담배 손님들은 계산이 조금만 늦어도 못 참고 짜증을 내거든요.”

 여의도 증권가 근처 편의점에서 편의점 알바로 일했던 안소현(21)씨 얘기다. 편의점은 많은 10대와 20대들의 일터이기도 하다. 처음으로 가혹한 세상을 만나는 곳이다.

 늦은 시간 술 취한 손님들을 상대해야 하는 건 편의점 알바가 겪어야 하는 일 중에 가장 힘든 일에 속한다. 강도나 사고의 위험도 있다. 홍익대 근처에서 일하는 양경래(21)씨는 “며칠 전엔 술 마신 미성년자 패거리가 몰려와 ‘마일드세븐 하나 줘봐라’라는 거예요. 어이가 없어서 쳐다보니까 ‘어쭈, 치겠다’ 하면서 때리려고 하더군요. 그 애들뿐이 아니에요. 맨정신에도 반말하고 때리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사람들 대하는 게 싫어서 손님들 얼굴 안 보고 짧게 답해요”라고 말했다.

 편의점 위치에 따라 알바들의 고민은 조금씩 다르다. 왕래가 많은 도심이나 유흥가의 경우 손님이 많아 힘들고, 인적이 드문 주택가에선 무료함을 견뎌야 하는 게 고민이다. 하지만 이들 모두에게 공통적인 고충은 손님들이 알바를 대하는 태도다.

 “ 손님 중에 돈을 테이블에 던지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 돈을 일일이 줍고 있노라면 내가 뭐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반말하는 것도 그래요. 다짜고짜 ‘소주 가져와’ ‘계산해’ 하면 무시당하는 것 같아요.”

  나이 어리고 힘 없는 알바생들은 법적인 권리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한 편의점에서 일하는 소재인(24·가명)씨는 점주가 근로계약서를 안 써준다고 했다.

 “계약서를 써달라고 하니까 싫은 표정을 지으면서 ‘의료보험료를 내야 한다’고 그러시네요. 원래 1주일에 40시간 근무하면 하루 휴일 수당을 줘야 하거든요. 그래도 여기가 시급이 센 편이라 그냥 참고 다니고 있어요.”

  경쟁이 심화하면서 편의점을 운영하는 점주들의 어려움도 크다. 지난해 중소기업중앙회가 편의점 300곳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32.7%는 적자 상태, 58.7%는 과잉 경쟁 상태에 있다고 답했다.

 이에 따라 기존의 편의점 운영 방식과 차별화하려는 편의점들도 생겨나고 있다. 서울 광진구의 CU는 옛 동네 구멍가게처럼 외상을 받아준다. 외상은 점주의 개인 돈으로 일단 해결한다. 업계 관계자는 “구멍가게 주인 할아버지의 정이 담긴 친절이 편의점이 갖출 미래 경쟁력”이라고 말했다. CU 올림픽광장점에서 일하는 김재현(24)씨와 강지선(22)씨는 아침 8시에 출근해 떡볶이와 오뎅을 만든다. 편의점 앞에는 파라솔을 펴고 의자와 탁자를 놓는다. 공원에 산책 나온 어르신들이 막걸리나 맥주 한잔에 오뎅을 안주 삼아 먹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대학로의 한 편의점은 스터디룸을 개설해 호평을 받고 있다. 스터디룸에는 텔레비전 크기의 모니터와 화이트 보드가 비치돼 있 다.

 편의점은 24시간 누구에게나 개방된다. 물건을 사려는 소비자들뿐 아니라 노숙자, 거지, 때로는 ‘내 말을 좀 들어 달라’는 정신이상자들도 이곳을 드나든다.

 서울 세븐일레븐 명동 본점에서 근무하는 김지영(26)씨는 노숙자들에게 친절하다. 물이나 유통기간이 지난 음식을 달라는 노숙자들의 청을 거절하지 않는다.

 “ 편의점 알바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됐던 때였는데요. 한 노숙자가 들어와서 유통기한이 지난 도시락을 달라는 거예요. 사장님이 그런 건 꼭 버려야 한다고 해서 일단 거절했죠. 그런데 자꾸 달라고, 배고프다고 하더군요. 너무 불쌍해서 ‘혼나도 할 수 없다’ 하고 그냥 줬어요. 그런데요, 며칠 후 그 노숙자가 비닐봉지에 10원짜리, 100원짜리, 500원짜리 동전을 잔뜩 담아서 갖고 온 거예요. 그때 도시락 값이라고요. 괜찮다고 하는데도 놓고 갔어요. 그때부터 노숙자들을 다시 봤어요. ”

 그는 직장을 다니다가 그만두고 다시 편의점 알바로 일하면서 오후엔 이력서를 쓰거나 직장을 구하러 다니고 있다. 편의점 근무 경험을 살려 유통업체에서 일하는 게 꿈이다.

 “2년 동안 매주 복권 사러 오셨던 동네 아저씨가 드디어 복권에 당첨됐다면서 저한테 1만원을 주셨어요. 800만원짜리 복권에 당첨되셨대요. 좋은 꿈을 꾸셨나 봐요. 편의점 알바 오래 했지만 그런 거 받아본 건 처음이었어요. 저한테도 그런 행운이 오겠죠?”

[S BOX] 편의점 ‘5대 행사’ 아시나요

설(음력 1월 1일), 밸런타인데이(2월 14일), 화이트데이(3월 14일), 추석(음력 8월 15일), 빼빼로데이(11월 11일).

 편의점 업계에서 1년 중 가장 매출이 높은 날로 꼽는 ‘5대 행사’다. 전국의 편의점은 행사 2~3주 전부터 분주해진다. 명절에는 과일과 치약 비누세트를, 기념일은 초콜릿과 사탕, ‘빼빼로’ 등을 매장 앞에 전시한다. 세븐일레븐 최민호 홍보팀 책임은 “일 매출 200만원이던 점포가 이날은 400만~600만원을 기록한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주요 지역 점포에는 조명을 새로 달고, 행사 도우미를 불러 스피커와 마이크를 이용해 판촉 행사를 벌이기도 한다.

 5대 행사 중 가장 매출이 높은 시기는 언제일까. 답은 ‘빼빼로데이’다. 빼빼로는 평소에도 편의점 효자상품인데 이날은 훨씬 더 많이 팔린다. 미니스톱 박형곤 홍보팀장은 “2~3년 전만 해도 남성이 여성에게 선물을 주는 화이트데이 매출이 가장 높았지만, 최근에는 직장 동료들끼리 선물을 주는 빼빼로데이에 가장 많은 물건이 팔린다”고 말했다. 화려한 포장지로 싼 커다란 사탕 바구니를 여성에게 안기는 게 과거 화이트데이의 풍속이었지만 요즘엔 고가 초콜릿이나 명품 가방으로 대신하는 일이 많아졌다고 한다.

박혜민·김민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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