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동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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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그건 아마 이 섬에 남겨진 사랑의 동상이 될 거야. 눈에는 잘 보이지 않겠지만, 그래도 처음으로 제 손으로 제가 지어 지니게 될 그런 동상, 아무도 목을 매어 끌어내리고 싶어 할 자가 없는, 이 섬이 우리 문둥이들의 것으로 남아 있는 한 오래오래 이곳에 함께 남아 있어야 할 단 하나의 사랑의 동상으로 말씀야…."

소록도를 무대로 한 이청준(李淸俊)의 소설 '당신들의 천국'에 나오는 한센병(나병) 환자 황노인의 독백이다. 일제시대 소록도에 병원장으로 부임한 주정수(周正秀)는 섬을 낙토(樂土)로 바꾸어 놓겠다고 선언한다.

처음에는 주민(환자)들도 원장의 뜻에 적극 호응해 병사(病舍).종각.등대.공원 같은 시설들이 착착 들어섰다. 그러나 자발적인 노동이 점차 강제성을 띤 착취로 변질되면서 주민들은 배신감에 빠진다.

섬 전체에 불어닥친 공사바람은 동상 밑 축대 높이만도 18척이나 되는 거대한 '주정수 원장상(像)' 건립으로 마무리됐다. 이후 주민들은 병원장의 동상에 매달 한차례씩 참배까지 해야 했다. 병원장은 결국 분노한 주민의 칼에 찔려 자신의 동상 앞에서 숨이 끊어진다….

서양의 동상은 관 뚜껑에 새긴 실물 크기의 사람 조각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고인의 형상을 새겨 놓으면 혼이 육체를 떠나지 않는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들의 천국'에 등장하는 것 같은 살아 있는 사람의 동상은 어떤 의미를 띨까. 아무래도 억지 권위나 억압, 허영과 명예욕의 결과물일 가능성이 크다.

바그다드 중심가에서 위용을 자랑하던 사담 후세인의 동상이 목에 쇠사슬이 걸려 쓰러지는 모습은 2천4백만 이라크인에게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후세인이 이라크 대통령 겸 집권 바트당 서기장에 취임함으로써 권력을 한손에 거머쥔 게 1979년이니까 적어도 30대 중반까지의 젊은 이라크인들은 정신적 공황마저 겪을지 모르겠다.

쓰러진 동상 앞에서 환호하는 이라크인들의 모습에서 불과 넉달 전 "후세인 대통령이 국민투표에서 1백% 지지를 받아 임기가 7년 연장됐다"던 독재정권의 발표가 얼마나 허황된지 입증됐다.

후세인의 동상도 결국 레닌.스탈린.마르코스.차우셰스쿠 등 '선배' 동상들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동상 철거가 미군 크레인의 도움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바그다드의 앞날이 반드시 순탄치만은 않을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노재현 국제부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