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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초같던 오영수선생|이범선<작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오영수선생이 가셨다. 선생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나는 너울거리는 파초잎을 생각했다.
20년쯤 전이었을까. 우이동에 있는 오선생댁을 찾아갔던 일이 있다. 오선생은 길눈이 어두운 분이다. 서울시청이 어딘줄 몰라 덕수궁앞이라고 가르쳐 주면 「덕수궁이 어딘고?」하고 묻는 그런 양반이었다. 그러니 자신의 집인들 요령있게 가르쳐 줄 수 있을리 없다.
거의 우이동 일대를 다 뒤졌다. 그러다가 문득 어느 골목을 들여다보니까 저만큼 골목안 어느집울타리 밖으로 커다란 파초잎이 쑥 나와 시원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대뜸 그집이 오선생의 집이란 생각이 들었다. 과연 문패가 달려있었다.
오선생의 부음을 듣는 순간 그날 그 골목 안에서 밖을 내다보던 파초를 생각했던 것이다.한마디로 참 깨끗하고 소박한 분이었다. 악의라곤 단 한점도 찾아볼 수 없는 그런 분이었다.
대개 사람은 어떤동물과 비유되게 마련이다. 학같다든가 사슴같다든가, 그런데 오선생은 어쩐지 식물을 연상케하는 그런 분이었다. 국이나 파초같은 분이었다.
나는 오선생보다 10년이나 아래다. 그런데 어쩌다 나는 오선생 앞에서 버릇없이 구는 얼이 많았다. 더구나 낚시를 함께 가서 물가에 앉으면 마치 같은 또래처럼 농짓거리까지 했던 것이다. 그럴때면 오선생은 『허참, 허긴 어린애들이 큰 붕어를 잡는 수가 있지』하며 그 독특한 웃음을 웃곤했다.
근년에 시골로 내려갔다. 낚시터가 좋다고 했다. 엽서로 한번 찾아가겠느라고 했더니 다음 상경했을 때 대뜸 『사람이 왜그리 싱겁노. 온다고 했으면 와야지. 사람 며칠을 꼼짝도 못하고 기다리게 만들고…』하던 것이다.
오선생은 그 엽서를 받은날부터 며칠을 꼬박 기다렸다는 것이다. 선생은 그런 분이었다. 시골 내려가서 더구나 그렇게 외로왔던 것이리라.
이번 여름에 오 선생을 찾아 내려가 며칠 낚시나 즐기리라 혼자 생각하고 있었는데 선생은 훌쩍 떠나시고 말았다.
워낙 게을러서 문병같은 걸 잘 못가는 버릇이 이번처럼 뉘우쳐지기는 처음이다. 사실은 병상에 누웠다는 소식을 듣고도 설마했고 얼마후면 『나 오요』하고 전화라도 걸려올 것이라 여겼던 것이다. 그런 오선생이 가셨다.
난초같은분, 파초같은분, 낚시터에 앉으면 신선같은분, 한편의 짧은 작품을 써도 매만지고 또 매만져서 구슬처럼 갈아야 직성이 풀리던 분. 이제 선생은 가시고 우리 앞엔 저 다보탑같이 곱고 깨끗한 선생의 작품만 남았다. 오선생님 편히 쉬십시오.

<작품세계>

<소시민적 삶의 애환 다뤄>
오영수씨는 50년, 그의 나이 41세 때 「데뷔」했으니 동연배의 문인치고는 「데뷔」가 매우 늦은 셈이다. 그러나 그처럼 늦은 「데뷔」를 만회라도 하려는 듯 「데뷔」 이후 그의 문학활동은 건강에 비해 매우 정력적이었으며 작품수준도 높고 다채로왔다.
초기작이며 대표작이기도 한 『머루』 『갯마을』에서 보이는 바와같이 그의 작품세계는 깊은 서정성을 바탕으로 하고있다. 그가 즐겨 다루는 소재는 대체로 소시민적인 삶의 애환이다. 따라서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늘 우리주변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인물들이지만 그 인물들의 생각과 움직임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메마르고 각박한 세계속에서 살고있는가를 일깨워준다.
이러한 근의 특질때문에 그의 작품에는 현실성이 결여 돼 있다는 비판도 받았으나 소박한 「리리시즘」을 앞세운 인간본성에의 추구는 우리문단의 거의 유일한 것으로 높이 평가되었다.
또한 그의 작가적 시선은 서정성에만 머무른 것이 아니라 가령 『명암』처럼 감방이라는 밑바닥삶을 보여주는 것이 있는가하면 『엿들은 대학』처럼 추악한 사회상을 풍자적으로 폭로한 소설도 있고 민족분단의 문제를 환상적으로 그린 『환상의 석상』같은 작품도 있다.
그의 호흡 짧고 「유니크」한 문체 또한 특이한것으로 평가되는데 그가 30년동안 단편에만 전력해온것도 그 까닭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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