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한국문학…무엇이 향제인가(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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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외국문학에 대한 현재까지의논의는 대체적으로 두 방향에서 행해지고있다고 할 수 있다. 그 하나는 외국문학을 어떻게 대하고 그것을 어떻게 수용하느냐는 수용의 문제로서 다루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외국문학연구를 하나의 학문으로 정립시키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하느냐하는 문학연구방법론의 문제로서 다루는 것이다.
외국문학의 수용문제는 한국의 근대문학이 외국문학의 이식에 지나지않는다는 극단적인 주장을 심리적으로 극복하려는 노력에 의해 제기된 것이다.
그 문제에 대한 가장 자명하고 논리적인 대답은 외국문학을 주체적으로, 다시 말해 한국문학의 입장에서 받아들이자는 것인데, 그 대답의 간명성·자명성에 비해, 그러면 어떻게 받아들이는 것이 주체적인 것이냐가 전제되지 않는한 그것은 거의 무의미한 대답이나 마찬가지라 할수 있다.
외국문학을 실천적으로 수용하는 문제에 있어 가장 첨예한 이론은 외국문학은 식민문학을 유발시키니까 가능한한 배격하고 민족고유의 것을 찾아내야한다는 것이다.
민족의 감정에 깊숙이 호소하는 그 민족주의적 발상이 근거를 얻으려면, 그렇다면 과연 민족고유의 것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불변하는 하나의 실체인가 아닌가 따위의 여러 문제들에 그 나름대로의 해답을 주어야한다.
그 민족주의적 발상에 맞서고있는 것이 가능한한 많은 것을 외국으로부터 받아들이자는 극단적인 자유방임주의적인 발상이다. 그 발상의 밑자리에는 외국의 것은 우수하고 한국의것은 저열하다는 무의식적인 판단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 두 극단을 피하려면 외국문학 역시 그것을 낳은 사회의 복합적 힘의 구현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한국문학 역시 그러하다는 것을 허심탄회하게 인정하는 것이다.
그뒤에 한국문학이 세계문학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하는 것을 현재의 한국문학의 자리를 엄격하게 진단함으로써 찾아내야한다. 한국문학은 아무리 국수주의적인 관점에서 본다하더라도 아직까지는 주변문학이다.
폭넓게 말해 주변문화란 한 정치학자의 표현에 따르면 해바라기처럼 중심문화를 향하게 마련이다. 문화의 유입은 불가피한 현상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 주변문화를 어떻게 중심문화로 이끌어 올리느냐가 중요한 실천적 문제로 되겠는데, 나에게 합리적으로 생각되는 것은 그 주변성자체를 세계문화의 보편적 공준으로 만드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식민문화의 이름으로 세계문화의 편협성을 비판한다는 식이다. 현재 중심문화로 알려진, 가령 「유럽」문화의 공준이 식민제국주의의 피해를 입은 주변문화의 구조를 이해하지못하고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중심문화의 문화적 공준을 바꿔야한다는 주장과 통한다.
결국 외래문화의 수용문제는 의식의 문제로 바꿔질 수밖에 없다. 외국문화, 좁게는 외국문학을 받아들이느냐 안받아들이느냐 하는 문제는 그때 거의 의미를 잃고, 한국문학의 주변성의 내포는 무엇인가하는 것이 문제로서 남게될 것이다.
외국문학연구방법론의 문제 역시 사실은 첫 번째의 수용문제와 그 밑자리를 같이하고 있다.
한국에서 외국문학을 연구한다는 것은 한국사람으로서, 한국사람의 입장에서 외국문학을 연구한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외국문학을 연구하는 사람의 정황에 관계없이 있는 그대로 연구한다는 것은 하나의 환상에 지나지않는다. 문학연구도 하나의 학문이므로 객관성을 가져야한다. 그러나 그때의 객관성이란 투명한 즉자상태의 객관성이 아니다.
인문사회과학의 객관성이란 글의 논리성, 어떤 관점에 의해 수용된 자료의 조리정연함에 지나지 않는다. 연구자의 주관성은 객관성에 장애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기초를 이루는 것이며, 그 주관성의 계속적 반성이야말로 객관화과정 그 자체다.
가령 초현실주의를 우리가 연구한다고 할 때, 초현실주의를 있는 그대로 연구하겠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대부분의 경우 초현실주의에 대한 자료를 자기들의 관점에서 재정리한 연구자들의 입장을 무의식중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초현실주의의 역사적 자리를 명확하게 알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그것이 연구자들에 의해 교묘하게 자기식으로 재편집되어 있음을 우리는 발견하게된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인문사회과학의 방법 자체라는 것을 인정하는 일이다.
한국의 국문학연구의 수준은, 이 글을 쓰는 나 자신을 포함해서, 아직 거기까지 가있지못하다.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아직 소개·해설의 단계에 머물러있다. 그러나 최근에 그 단계를 뛰어넘은 연구서들을 몇권 갖게된 것은 다행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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